기혼샘 신약설교말씀

[사도행전 3장 강해설교말씀] 유쾌하게 되는 날(사도행전 3:17-26)

기혼샘 2023. 3. 1.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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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에서는 베드로가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됩니다. 성도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입니다. 우리가 창세 전에 하나님께 선택받아 구원받았습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사도행전 3:17-26)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으니라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 "유쾌하게 되는 날(19)"이라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제목으로 해서 본문말씀을 함께 공부하고자 합니다. 본문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 뒤에 행한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말씀으로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베드로 설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사건을 두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큰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건을 놓고 성경적 의미, 그리스도적 의미, 구속사적 의미, 모든 백성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구원적 의미를 설명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 일어난 사건에 어떤 것이 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먼저, 모든 사람이 방언을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순간에 모든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림으로 방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각 나라 사람들이 모였지만 통역 없이 전부 그들의 말로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하여 설교할 때에 모든 사람이 그것을 각기 그들 나라의 말로 듣게 됩니다. 이렇게 언어의 장벽이 일시에 무너짐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랍니다. 세상에 이런 기적을 본 적이 없거든요. 너무 희한합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이 이적을 놓고 설교를 합니다. 선지자 요엘의 말씀을 들어 이것은 성경에 이미 예언된 일이니 놀랄 것 없다고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에 담긴 그리스도적 의미, 선교적 의미, 복음적 의미를 저들에게 설교해 나갑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다음으로 사십 년 된 앉은뱅이가 성령으로 일어선 사건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거지가 있습니다.

그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는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다니시며 병 고치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 성령이 작용함으로 나는 보잘것없는 갈릴리의 어부라든가, 나약한 존재라든가 하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다만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역사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앉은뱅이 역시 벌떡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이적을 목도한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베드로에게 모여듭니다. 설명이 필요한 순간을 맞아 베드로가 다시 설교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 예수님의 영이 역사 하시어 이 사람을 낫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쳐다볼 것 없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중요한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예수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그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주님께서 생명의 응답을 주신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그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귀중한 진리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베드로 설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의 본문말씀은 베드로 설교의 후반부로 결론에 해당합니다. 결론이란 언제나 실제적이요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 역시 회개하라는 교훈을 결론으로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다, 모두 이 능력 앞으로 나아와야 하고 이 거룩한 역사 앞에 나아와 동참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는 곧 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병 고침 받은 그 이적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적을 구하십니까? 이적으로 돈 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 이적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누가 이적을 보았습니까? 장님이 눈을 떴습니까, 앉은뱅이가 일어섰습니까? 어떤 이적이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이적을 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그 이적 앞에서 경건한 회개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여기 역사하고 계시기에 이제 우리는 그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말씀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결정적이자 커다란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입니다. 당시의 유대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저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그 죄까지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회개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다소 어렵지만 깊이 상고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14)"라고 유대인들에게 권고하는 가야바의 잘난 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말이 되긴 합니다만,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한 사람이 그냥 한 사람입니까? 의인인지 죄인인지는 문제가 안 된다는 말입니까? 온 민족이 편할 수 있다면 의인 한 사람쯤이야 죽든지 살든지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무식한 소리입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서 어찌 그 민족이 편할 수 있기를 바랍니까? 이것을 철학적으로는 '공리주의'라고 말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보다 적은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공리주의입니다. 의인인지 죄인인지 가릴 것 없이 말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철학입니다. 그런데 가야바를 보십시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듯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그는 아주 무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 : 34)" 여기서 '저희'라고 하는 말은 직접적으로 가야바까지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가야바가 스스로 짓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알았다면 왜 예수님을 팔았겠습니까?

Jesus Christ Superstar라는 제목의 뮤지컬이 있습니다. 영화로도 현대판 오페라로도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 주제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습니다. 그 가사 가운데 특별한 구절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로, 하나의 서사시입니다. 뮤지컬의 맨 마지막 부분에 가서 죽었던 가룟 유다가 되살아납니다.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그 혼령이 되살아나서는 돌아다니며 구슬피 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장면이 그렇게 제 마음을 찌를 수가 없었습니다여러분, 유다는 그 자신 똑똑한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주 멍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긴 시간 '내가 죽었다가 부활하리라'하셨는데 그동안 뭘 하고 앉았다가 예수님을 팔아놓고 뒤늦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걸 보고 기가 막혀합니까? 부활하신 다음에 가슴을 치며 후회합니까? 혼령이 나타날 만도 해요. 그 망령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분하고 억울하잖아요. "왜 내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경륜이 있다고 미리 말씀하셨더라면 내가 왜 예수님을 팔았겠습니까?"라고 할만하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똑똑한 척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를 못합니다. 모든 죄의 원인은 무식에 있습니다. 일생동안 제멋대로 살아놓고 나이 들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리 살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후회합니다. 참으로 미련스럽습니다. 가만히 보면 별난 이야기도 아닙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가장 상식적인 이야기를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후회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잊은 채 돈 벌고 공부하는 데에 온 정열과 시간을 써버렸습니다.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죄 값은 사망이라는 간단한 진리를 몰랐습니다. 무지했기에 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결국 모든 죄는 무지에서 비롯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을 놓고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벌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9:41)." 차라리 알지 못했으면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인데, 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바로 영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지입니다. 안다고 하는 교만이 바로 무지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것을 몰랐습니다. 몰랐기에 이렇듯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는 깨달았습니다. 지난날의 일이 다 죄였음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지난날의 무지를 오늘날에 깨닫는 것입니다. 무지했음을 시인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 자신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도 모르고 한 일이기에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알고 했다면 그 죄는 사함 받을 수 없습니다. 안다고 고집도 부리고 독선도 부렸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을 합니다. '나는 이렇게 어리석고, 이렇게 무지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하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깨닫는 순간에 과거의 모든 무지가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무지함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만일 그 무지를 시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하지 않는 한은 어떤 죄도 사함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예수님을 핍박했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했던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했다고 하는 이 무지가 회개 가능성의 기초적 교리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아주 신비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18)." 사람들에게 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교만도 있었습니다. 엄청난 반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들이 죄악, 인간들의 잔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역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무지, 인간의 악, 인간의 간사함은 십자가에까지 뻗쳐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죄, 가야바의 죄, 빌라도의 죄가 다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의 의미는 초월적으로 역사합니다. 인간들의 죄와는 상관없이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죄가 크지만 그 은혜는 더욱 크니까요. 죄가 엄청나지만 그 은혜는 그보다 더욱 엄청나니까요. 그렇습니다. 예언하신 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내가 회개한다고, 뉘우친다고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야만 합니다. 내가 가슴을 친다고 되나요, 뉘우친다고 되나요, 고행을 한다고 되나요? 사실 우리의 뉘우침과 회개라고 하는 것, 그 자체는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은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면 그 회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만히 보면 우리에게는 이런 어리석은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놓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한번 잘못한 이상은 일생 동안 그 죄를 갚으려고 해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그 사람은 이미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상처는 치유받을 길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니까 죄를 지어놓고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자녀를 위해서 몰래 생활비나 학비를 익명으로 일생동안 보내줍니다. 그렇다고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뉘우친다고, 회개한다고, 눈물을 흘린다고 죄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일생동안 눈물 흘려도 소용없습니다. 설령 자살을 한다 해도 그 죄는 사함 받을 수 없습니다. 뉘우치는 것도 은혜지만 그 뉘우침을 받아주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회개한다고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은 은혜 안에,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누구에게 잘못하거나 누구와 불화했을 때에 만나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합니다. 그때에 상대가 ', 그럽시다'하면 다 해결된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은 죄로 인한 결과는 그대로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뉘우침이나 후회나 가슴을 치는 행위가 결코 회개를 이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그보다 더 큰 은혜로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심으로, 수용해 주심으로 비로소 회개가 되고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못했을 때에 그들이 스스로 그 잘못을 뉘우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말이 없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매를 듭니다. 때리면서 뭐라고 합니까? 제발 잘못했다고 말 좀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용서하겠노라 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잘못을 빌지 않는 못 돼먹은 자식이 있습니다.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하면 용서하겠다는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절대적 은혜입니다.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은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회개할 기회가 있다고 하는 것도 은혜이지만, 그보다는 내 부족한 회개를 주님께서 받아주시고 수용해 주신다는 것이 더욱 큰 은혜인 것입니다. 내가 '죄송합니다'하고 한마디만 해도 주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탕자가 돌아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온다고 해서 회개가 되는 것입니까? 탕자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없앴으며, 얼마나 아버지의 속을 태웠습니까? 이제 거지꼴이 되어 집에 돌아옵니다. 돌아오면 오는 것이지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마저도 영접합니다. 때문에 그 회개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담긴 깊은 신학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20절에 보면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라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21)"이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함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온다고 하는 이 회개에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를 영접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뿐만 아니라, 주님 재림하실 그때에 하늘로 들리어질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나라의 백성이 되고, 앞에 있을 구원의 약속을 여기서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메시아 대망사상이,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주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의 세상에서 벗어나 주님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왕권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재림사상의 빛 안에서 회개의 의미를 재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복음의 은혜성에 대해서 설명해나가고 있습니다.

은혜성의 역사성과 성서적 의미를, 예언과 성취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회개와 은혜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이루어지고 있기에,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과거사를 들춥니다. 모세를 들어 말씀합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22)……"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여기에 얼마나 중요한 구원론적 의미가 있는지 모릅니다. 애굽은 세상이요, 광야는 교회요, 가나안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요, 교회는 세례요(고린도전서 102절은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요단강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렇듯 그림을 그리듯이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유대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인물입니다.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까지 모세가 지도자가 되어 저들을 이끕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율법을 내준 사람입니다. 율법과 은혜를 저들에게 소개한 사람입니다. 그 모세가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회개하고 믿음으로 따르라, 그리하면 지난날 어떤 죄를 지었든지 묻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이제 저들은 모세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모세가 저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러한 믿음입니다.

당시는 제사장, , 선지자가 구분되기 전이었기에 모세는 아론이 제사장 될 때까지 그 세 가지 직분을 다 맡았습니다. 모세 자신이 레위 족속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왕 같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제사장이기도 하고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 선지자, 제사장, 이 세 직분을 통합해서 가졌던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때문에 모세가 메시아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믿게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복음을, 그 역사성을 더듬어서 모세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이 다 망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종말론적 계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24, 25)" - 사무엘로부터 모든 선지자가 다 예수님께 대하여 말씀했고, 그 자손 아브라함 역시 그의 모든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도 베드로는 이스라엘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백성들에게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19)" 합니다. 회개는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그 생활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돌이키다'라는 말은 새로운 방향으로 영적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방향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죄 없이함을 받으라"하는 본문말씀대로 회개하고 죄 사함 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함을 받으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19)"라는 복음을 주고 있습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은 헬라어 원문대로 하면 "카이로이 아나프케오스"가 됩니다. 번역상 조금 문제가 있는 말입니다. '카이로이''시간'을 의미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times로 복수의 뜻입니다. 그리고 '아나'again, '프케오스'는 '김을 불어넣는다, 시원하게 한다, 숨을 쉰다'를 의미합니다. 결국 '아나프케오스'라고 하면 '다시 김을 불어넣는다,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라는 말이 됩니다.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2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어 만드시고, 그 안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숨을 쉬게 되어 비로소 사람이 됩니다. 흙덩이가 사람이 됩니다. 그 흙덩이 된 인간이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에 다시 생명의 재창조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시 김을 불어넣게 됩니다. 그래서 유쾌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선한 공기로, 신선한 생명력으로 재창조된다는 의미입니다. 유쾌한 생명은 회개한 다음에 얻어지는 영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한 사람은 협박에 쫓길 필요가 없습니다. 죄 책에 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유쾌한 것입니다. 이 마음을 돈 주고 바꿀 것입니까? 물질과 명예로 바꿀 것입니까? 회개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이 '유쾌한 심령'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말씀은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유쾌한 맛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덜 회개했기에 유쾌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도 문제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유쾌하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죄로부터 벗어난, 죄 사함 받은 심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으로 보던 사람이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게 됩니다. 쓸모없는 사람이 이제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됩니다. Useful 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실패해도 성공해도 상관없습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죽으면 주님 앞에 갈 것입니다. 그러니 유쾌한 것이지요. 과거로부터 온전히 벗어났기에 현재는 의미 있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약속된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하루하루를 가장 뜻있는 시간으로 살아갑니다. 이 유쾌함을, 시원함을 영어로는 fresh라고 합니다. 유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유쾌함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얻어집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면 상상도 못 했던,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유쾌한 시간이 올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내가 만드는 심리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주님께로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레위기 구속사 하나님 말씀] 번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사(레 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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