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열왕기상 17장 주일설교말씀] 이 일 후에(왕상 17:17-24)

기혼샘 2021. 2. 13.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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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열왕기상 17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이일 후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뭄을 주시고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보내게 됩니다. 그곳에서 까마귀를 통해서 아침과 저녁에 떡과 고기를 제공해 주십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릿 시냇가도 말라버렸습니다. 그다음에는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곳에 과부를 준비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명령을 받고 사르밧으로 갔더니 과부를 만나게 됩니다. 그 집에서 있으면서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일이 지난 후에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의 시련을 통해서 믿음을 더 확고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어려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더 연단하고 단단하게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어려운 고통의 시간이 있다면 때가 되매 반드시 해결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빛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믿음으로 이겨나가야 합니다.

이 일 후에(왕상 17:17-24)

 

왕상 17:17 이 일 후에 그 집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왕상 17: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왕상 17: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왕상 17: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 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왕상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왕상 17: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왕상 17: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제가 전도사 시절에 사역하던 교회에 어떤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어릴 때 믿었던 에수님을 어른이 되어 새롭게 발견한 후 몹시 기뻐하면서 신앙생활을 잘해 갔습니다. 설교를 들으면 아주 기뻐하고 예배 분위기를 만족해하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마음에 평안에 있다고 고백하면서 교회생활을 잘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 이 분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차가 이 아이 위를 지나갔다고 하는데 다행히 살아났습니다. 여러 가지 후유증은 있었지만 몇 차례의 수술을 받으며 다행히 다른 장애를 입지 않고 회복이 잘되어 교통사고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습니다.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자 남편을 비롯해 주위의 가족들과 사람들이 안 다니던 교회를 다니니 집안에 이렇게 우환이 생기지 않느냐 하면서 이 부인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 갈수록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교회를 나오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무사히 퇴원을 한 이후에도 교회 출석하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이일 후에 =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 백성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 또 왜 성도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 17절에 보면 이일 후에 사르밧 과부의 집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병들어 숨이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이 일'이 어떤 일이었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이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밀가루가 통해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기름이 병에서 멈추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여러 달 동안 경험한 후에'라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의 아들의 몸속에 죽을 병균이 파고들 때 막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을 일부러 당하게 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 아이의 몸속에 어떤 균이 파고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 균을 막을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내버려 두시고 그런 큰 은혜를 경험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비탄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고 계신 것을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모든 해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답은 이 여인이, 이미 받았던 작은 은혜에 만족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아이와 함께 끊어지지 않는 밀가루를 먹으며 감격과 기쁨과 찬송에 가득한 나날을 얼마 동안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기대하고 계시는 것은 식구들과 더불어 굶지 않고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 생의 마지막 목표가 아님을 이 여인이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식주를 채워주시는 정도의 은혜에 우리가 머물러서 그것을 만족하고 그 이상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무 작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그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해 보여야 할 삶을 살 것을 이 여인에게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내 식구들끼리 모여 잘 먹고 잘 입고 만족할 만한 육신적인 삶에 머물러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십니다. 이 여인이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친히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태복음 62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즉 먹고 마시는 의식주에 관계된 것, 우리의 육체에 관련된 그것을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체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라'(마 6:11)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대하시는 것은 그저 먹고 마실 것 있으니 만족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크심이 내 삶을 통해 증거 되는 삶을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 영적으로 무장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이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18).

정말 엘리야와 이 여인이 상관이 없습니까? 얼마 전에 이 여인이 밀가루 한 움큼을 마지막으로 먹고 이제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소망의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이 여인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이 여인이 관계없습니까? 위기가 닥쳐오니 자신에게 그렇게 큰 은혜의 통로가 되었던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을 합니다. 이런 연약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임을 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라고 말합니다. 내 죄 때문에 내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머니의 죄 때문에 자식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자식과 어머니와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어머니 때문에 자식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죄로 인해 자식이 영향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고통의 자리에 빠지게 되었을 때, 자신의 옛 죄가 생각났습니다. 이 여인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옛날 하나님을 만나기 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을 섬기고 시돈 땅에 있는 각종 우상을 섬겼던 죄로 아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이 찾아올 때 우리가 받는 유익 중의 하나입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배부르게 잘 먹고 지낼 때 생각지 못했던 자신의 죄가 뇌리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통의 자리에서 깨닫게 되는 은혜가 이 여인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인들 김소월 선생과 박목월 선생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 두 분 다 시를 짓는데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김소월 선생이 쓴 시를 보면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고 노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실패한 사랑으로 인해 겪었던 고통을 시를 통해 토해 놓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들을 통해 가슴을 찌르는 그의 아픔이 우리 마음에 그대로 전달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김소월은 그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고통을 극복할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아름다운 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던 박목월 선생은 좀 다릅니다. 그도 역시 자기의 고통을 우리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좀 다른 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인생관을 그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네 믿음이"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시에서 어떻게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극복했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

 

앓는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앓음으로써 비로소 한밤에 일어나

자기 믿음을 가늠해 보고 애절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불러보고 간구한다.

병이 낫는다는 것은 당신의 사람이 된다는 것

요는 당신의 사람이 된다는 것

주여!

당신의 보혈이 핏줄마다 서리게 된다는 것

할렐루야!

당신 옷깃에 스치는 것만으로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저의 믿음으로 저를 구원하게 한 이 영원한 원리 속에서

더욱 상쾌한 새날을 맞게 된다.

 

하나님을 알았던 박목월 선생은 고통의 의미를 알았고 고통의 배후에서 그 고통을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도 알았습니다. 박목월 선생은 고통을 통해서 한밤에 일어나 깊이 자신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통의 치유를 통해 자신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 되는 경험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할 삶의 현장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시돈 땅을 2900년 전에 지배하고 있던 그 사탄이나 오늘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이나 똑같은 존재입니다. 그 사탄이 똑같은 권능과 힘과 궤계를 가지고 오늘 여전히 우리를 공격하고 힘겹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고통은 그것이 어디서 왔든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를 무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새로운 기회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스스로 만족해하는 이기적인 삶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족하게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것이 삶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가족을 생각하는 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만 생각하며 사는 것은 바른 성도의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 때 가족과의 관계가 온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부부 관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돕는 배필로 사는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남편 내 아내를 도와주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흠 없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 섬기며 이 길을 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욕심에서 가정을 섬기는 것과는 아주 다른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자녀들을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양육하고 이 사회와 이웃을 위해 쓸만한 사람이 되도록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가정을 다스려가는 책임 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바라보며 가정을 다스려가는 책임 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 된 삶을 살 것인가?'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이 섬김에 동참하면서 이 영역을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개념을 더 넘어서서 가정을 섬길 뿐 아니, 교회와 이웃을 힘 있게 섬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 엘리야를 연단시키시는 이유 =

 

우리가 엘리야를 통해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 또한 사르밧 여인과 별 차이가 없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영적으로 무장될 필요가 없습니다. 더 강한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경험한 다음 그는 더 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81절에 보면 엘리야는 아합에게 보내집니다. 그 무서운 적들에게 보내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쳐야 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들고나가 싸워야 했습니다. 그전에 엘리야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과, 하나님의 권능을 다시 한번 경험하고 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야가 먼저 보아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짐작컨대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게 경험했던 이 여인이 지난 몇 달 동안 엘리야를 잘 대접하였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말한 그대로 밀가루 통에서 밀가루가 끊어지지 않는 모습을 이 여인이 보았습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을 섬기듯이 엘리야를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고통이 찾아오니 엘리야를 향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런 인생의 연약함을 보아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의 약함을 보게 됩니다.

 

엘리야가 이 여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놓고서도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느냐며 흥분했을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받아도 보통 은혜를 받았던 것이 아니고, 축복을 받아도 보통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닌데 이 여자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고, 자신과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보아야 했던 것은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어려움과 죽음의 고통 앞에 선 인간들이 이렇게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당신 같은 불신앙 하는 여인과는 얘기하기도 싫소'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연약함을 바라보는 엘리야가 그 마음에 끊어 오르는 분노와 연민과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이 여인에게 아들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의 기도를 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본문에 보면 좀 이상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납니. 그러나 엘리야가 어떻게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는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엘리야가 이 아이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할 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엘리야가 경험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앞에 담대하게 무장하여 나갈 수 있는 담력을 새롭게 회복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는 날들을 보게 될 것을 믿습니까? 죽음의 실체가 우리 모두를 다 갈라놓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새롭게 발견하고 믿는 것이 있습니다.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영원한 한 가족으로 살게 하실 것을 이 기록을 통해 믿,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마음속에 가득히 채울 , 우리가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담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죽어서 갈 영원한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괴롭지만 죽음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면서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부활케 하시는 그 권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아름다운 땅에 들이실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더욱 담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성경이 증거 하는 사르밧 여인의 믿음 =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나는 여인을 보면 엘리야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히브리서 1135절에서 "여자들이 믿음으로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했다"라고 말합니.

 

성경에 등장하는 여자들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부활로 다시 돌려받았던 여인들이 몇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 기록의 순서로 보면 죽은 자가 다시 권능으로 살아나는 예는 본문이 첫 번째 예입니. 엘리사 시대에 수넴 여인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엘리야의 기도의 권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5:17, 18). 엘리야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게 했던 권능의 기도를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언급하고 있는 것은 엘리야가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 했던 그런 기도의 권능에 대해서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35절의 여인들 속에 오늘 본문의 사르밧 과부가 포함될 수 있는가를 중요한 논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 앞에 이렇게 원망이나 하고 있는 여자가 어떻게 믿음으로 자기의 자녀를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이 아이를 돌려받은 것은 엘리야의 기도의 응답이거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 이 여인의 믿음에 대한 응답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이나 다른 사건들과 함께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1111절에 사라의 믿음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요, 사라의 나이 89세 되던 해에 세 천사가 방문하여 '내년 이맘때 기한이 이를 때에 너희가 아들을 안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그때 장막 안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던 사라가 바깥에서 아브라함과 천사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런 일이 어찌 일어날 수가 있을? 내가 나이가 89세인데' 속으로 비웃은 사라에게 천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웃느냐고 질책했습니다.

 

사라는 순간적으로 '웃지 않았습니다.'라고 변명을 둘러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라는 천사를 통'아니 네가 속으로 웃었느니라'라는 책망을 그 순간에 받습니다. 런데 그 이후에 사라가 믿음을 가졌다는 기록이 창세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를 보면 사라가 그 이후에 믿음을 가지고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그 아들을 기다렸고 마침내 그 아들을 얻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전한 마음으로 믿고 나아가는 것을 보고, 사라도 같은 믿음을 가졌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똑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히브리서가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르밧 여인도 같은 경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여인이 아이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 갈등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말지 어떻게 내 자식이 죽어야 하는가?' 하며, 이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엘리야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통에 차서 외마디 소리를 지를 때 엘리야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 여인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이 여인을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이 여인의 아픔을 이해하면서 부드럽게 그 아이를 내게 달라고 말합니다. 엘리야에게 아이를 내놓으면서 이 여인이 심중에 '손해 볼 것 없으니 한 번 해보자'라고 생각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동요하지 않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몇 개월 동안 밀가루 통에서 밀가루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이 아이를 넘겨주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아이를 안고 가서 기도 할 때 어쩌면 이 여인도 다락방 문까지 따라 올라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간절하게 기도할 때 그 여인도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이 여인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35절이 '여자들은 믿음으로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와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경험하는 이런저런 외로움과 고통과 환경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 통에서 밀가루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이 여인의 한 조각 믿음을 보시고 죽은 아들도 살리셨던 이 하나님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이 하나님의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앞서 떠나갔던 친구들, 사랑하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들이 먼 곳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을 부활로 받을 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시간이 길로 짧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고통이 크다고 할지라도 생명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사르밧 여인과 엘리야에게 함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와 우리 세대에 함께 하시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가 시련 당 하는 것을 이상해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12절에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썼을 때 이 편지를 받았던 성도들은 오늘 우리 중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고 자녀들이 사자밥이 되는 광경을 보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리고 살 곳이 없어서 지하묘지인 카타콤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 그런 고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베드로가 "너희를 시련하려고 너희에게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 시련과 고통을 통해 너희가 강한 자가 되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 수 있다"라고 권면했을 때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300, 400년을 지하 카타콤 속에서 보내는 세월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캄캄한 카타콤 속에 거하면서도 아이를 낳으면 유아 세례를 주고, 아이가 죽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장례를 지내고, 죽은 남편의 몸을 바로 그 카타콤의 벽장 위에 눕히는 그런 삶을 대를 이어 살면서도 그들이 당하는 고통 앞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그들이 가졌던 그런 확신 때문에 4세기경에 로마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로마가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 우리가 씨름하고 있는 죄, 우리가 보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고, 그 고통 속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새로운 기회로 바꾸어 주실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작은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부끄럽게 천국으로 가는 그런 자가 아니라, 더 강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삶을 살다가 그 아름다운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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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레위기 6장 설교말씀 중에서 번제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상징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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