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히브리서 10장 강해 설교말씀] 담대히 서로 격려함(히 10:1-39)

기혼샘 2022. 6. 2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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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0장에서는 구약 제사의 한계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올 그림자일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완전한 속죄를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제사의 완성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인하여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 성도는 율법의 의로 속죄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속죄를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속죄를 받고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담대히 서로 격려함(히 10:1-39)

 

1-18,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사역

[1-4]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 . . .

본문은 말한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율법제도는 부족하였다. 율법제도는 장차 오는 좋은 일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대한 그림자 즉 예표이었고 참 형상이 아니었다. 참 형상은 예수님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제도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그 증거는 제사의 반복성에 있었다. 만일 제사가 사람을 온전케 하였다면 그것은 해마다 반복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 제사는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다. 이것은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사람의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한다. 여기에 율법제도, 구약제도의 부족이 있다. 즉 상징적인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없이 하거나 사람을 온전케 하지 못하였다.

[5-7]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 . . .

본문은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본문은 구약의 시편 40:6-8의 헬라어 70인역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구약성경 본문과 조금 다르다. 헬라어 70인역 구약성경은 사도시대에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성경이었던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이 헬라어역 구약성경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인용된 시편 본문은 메시아께서 번제물과 속죄제물이 아니고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과 이것이 두루마리 책 곧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한다고 말씀하셨다(5:39). 메시아 사역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8-9]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번제와 속죄제는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 인용된 말씀에 의하면, 메시아께서는 오셔서 그 첫 것 곧 율법 아래서의 제사제도를 폐하시고 둘째 것 곧 자신의 몸을 드려 이루실 사역을 이루실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제도, 제사제도의 폐지와 그 대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사역의 완성이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절 이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우리의 속죄를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 여기에 거룩함을 얻었다는 원어(헤기아스메노이)는 완료시제로서 우리의 거룩함이 시작이나 진행 중인 것이 아니고 단번에 이루어진 것임을 말한다. 같은 표현이 고린도전서 1:2에도 나온다. 거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라고 표현하였는데, 원문에는 역시 완료시제이므로 거룩하여졌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얻었다. 이것이 법적 거룩과 의, 즉 법적 구원인 것이다.

[11-13]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우데포테)[결코]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구약 제사장들이 드렸던 제사들은 결코 죄를 없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 곧 속죄제사를 드리셨다. 그의 죽음은 영원한 속죄제사의 행위이었다. 그의 피 흘리심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하는 행위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완전하였기 때문에 그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그의 원수들 곧 사탄과 악령들과 그 종들이 다 굴복하게 되기까지 거기서 기다리시다가 그때가 되면 심판자로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본문은 말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온전케 하셨다는 원어(테텔레오켄)도 완료시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심과 의롭다 하심이 완전하였음을 증거한다. 물론 그것은 법적인 개념이다. 실제적으로는 아직 우리 속에 불결과 죄성이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거룩과 완전한 의를 얻은 자들이 되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4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하였다.

[15-18]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신약 성도의 삶은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살고, 우리 마음에 심으신 법으로 산다. 그것은 종의 법이 아니고 자유의 법이다. 성도는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와 불법을 기억지도 아니하신다.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완전하다. 이 구원 안에서 우리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고 천국의 영광을 확신한다.

1절부터 18절까지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완전함을 한번 더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한 영원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고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 여기에 성도의 평안과 자유와 기쁨이 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구원 곧 법적인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함을 깨닫자. 또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감사도, 찬양도, 기도도, 봉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또 그를 본받자.

19-25,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권면함

[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 . . .

본문은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형제들아라는 말은 천국 백성에게 합당한 명칭이다. 예수 믿고 구원얻은 자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有無識)을 막론하고 주 안에서 다 형제들이다. 우리는 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다(3:1).

본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 권면하기에 앞서 권면의 근거를 말한다. 그 첫째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피는 9장에 말씀한 대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피이다(12). 그 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으나 예수님의 피로 죄씻음을 받은 자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다.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소의 휘장을 찢듯이 자신의 육체를 찢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다. 그 길이 새로운 길인 것은 구약제도 아래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길이기 때문이다. 또 구약의 제사제도가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무력했던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길은 효력이 있고 생명력이 넘친 길이다. 누구든지 이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다.

[21-22]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권면의 두 번째 근거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집은 교회 혹은 천국을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주께서는 천국이 이미 성도들 가운데서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다(17:20-2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큰 제사장이시며 우리의 크신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을 섬긴다. 또 그는 우리가 연약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고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새 힘과 용기를 주신다.

권면의 세 번째 근거는 죄사함의 사실이다. ‘양심의 악을 깨닫고’(아포 쉬네이데세오스 포네라스)라는 원어는 악한 양심이 깨끗케 되고’(NASB, NIV)라고 더 잘 번역할 수 있다. 우리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악하고 더러웠던 양심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몸을 맑은 물로 씻은 바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 내포하는 중요한 내용인 죄사함이다.

권면의 근거는 이와 같이 세 가지 사실, 즉 첫째로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사실, 둘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사실, 셋째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의 피로 씻음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죄사함이다.

우리의 죄사함에 근거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서너 가지의 내용을 우리에게 권면한다. 첫째로, 그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권면한다. ‘온전한 믿음으로라는 원어(엔 플레로포리아 피스테오스)믿음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온전한 믿음 혹은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믿음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참된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믿음은 성도의 필수적 요소이며, 참되고 충만한 믿음은 진실한 성도의 목표이다.

[23-25]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둘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소망의 고백을 굳게 잡자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소망이라는 원어(텐 호몰로기안 테스 엘피도스)소망의 고백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 권면은 소망에 대한 권면이다. 성도는 믿고 고백하는 소망의 내용이 있다. 성도의 소망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는 이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기 때문이다.’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약속하신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우리의 소망의 내용들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한다. 만일 성도에게 소망이 없으면 그는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며, 성도는 세상 사람보다 더 불쌍한 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과 소망 때문에 세상의 낙을 다 누리지 못하고 또 심지어 고난과 핍박까지 당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고 권면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또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디도서 2:14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다. 사랑과 선행의 이 의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돌아보며 서로 격려해야 한다. 여기에 성도의 교제의 필요성이 있다.

넷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자고 권면한다. 사람에게는 게으른 성질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모이기를 폐하고 그것이 점점 습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본받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모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시간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아 영적으로 힘을 얻고 자라가는 기회이다. 또 그것은 서로 교제하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주 모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다른 이들을 권면하고 격려해야 한다.

19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한 권면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먼저 권면의 근거로서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는 것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몸과 마음이 깨끗함을 얻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것의 요점은 죄사함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죄사함에 근거하여, 네 가지를 권면한다. 첫째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신앙고백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 셋째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 넷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자.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신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권면하시는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욱 굳세게, 풍성하게 해야 할 것이다.

26-39, 믿음의 담력과 인내가 필요함

[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 . . .

본문은 말한다. “[이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헤쿠시오스)[자발적으로,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있을 것임이라].”

본문은 성도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 굳세게 가져야 할 이유가 고의적 범죄가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임을 증거한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말은 구원받은 후라는 뜻이다. 진리는 복음 진리이며 진리의 지식은 복음의 지식이다. 이 지식은 믿음의 필수적 내용이다. 죄 중에는 무지하여, 실수로 범하는 죄가 있고,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 전자는 죄책(罪責)이 작으나, 후자는 죄책이 크다. 모든 죄가 다 지옥갈 만한 죄이지만, 죄에는 죄책의 경중(輕重)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레위기 4:2, 22에 보면, ‘그릇, 부지중에실수로, 무지하여범하는 죄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수기 15:30에 보면, ‘짐짓고의적으로, 도전적으로범하는 죄가 있는 것이다. 민수기 35:16에도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는 고살자(故殺者)[고의적 살인자]에 대해 말하는데, 그런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규정되어 있고, 시편 19:13에도 고범죄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들은 큰 죄이다.

본문에 죄를 범한즉이라는 원어(하마르타논톤, 현재분사)계속적 행위를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버리고 그와 정반대로 행하여 고의적으로 계속 범죄한다면이라는 뜻인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이런 고의적인 죄 가운데 계속 머문다면, 그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는 것이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까닭은 그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 기다리는 심판은 마지막 불의 심판이다. ‘맹렬한 불이라는 말은 진노의 불이라는 뜻이며, 마가복음 9장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강하게 증거하신 지옥의 불을 가리킨다.

이런 심판의 선언은 구원받은 자들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선언은 경고의 말씀이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는 강조로 받아야 할 것이다. 믿다가 타락한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믿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만 사실상 중생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종종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경고의 말씀이 있다. 히브리서 6:4-8도 그러하였다. 로마서 11:20-22도 그렇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 외에도, 마태복음 7:21; 로마서 8:13 등이 그러하다.)

[28-29]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 . . .

본문은 말한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시대에 비추어 그의 경고의 말씀을 강화시킨다. 구약시대에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원한 없이 우연히 밀치거나 무엇을 던져 사람을 죽게 하였다면 그는 도피성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고의적, 계획적 살인자는 두세 증인에 의해 확인한 후 반드시 사형시켜야 하였다(35). 이와 같이, 실수의 죄와 고의적 죄는 분명하게 구별되었다. 모세의 법을 어긴 죄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을 부정하고 짓밟고, 자신들을 거룩케 한 언약의 피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욕하는 자들이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엄중한 것이겠는가? 인간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도 엄중하였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실제로 오셔서 주신 복음 진리를 저버린 죄의 벌은 얼마나 더 크고 엄중하겠는가 하는 말이다.

[30-31]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이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앎이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근거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으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저 복음 진리를 저버린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가! 옛날 노아 시대에 심히 강포했던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한 사실을 기억해보라(8-10). 또 심히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을 유황불비로 심판하신 사실을 기억해보라(19). 또 광야에서 모세를 거역하다가 산 채로 땅 속에 떨어진 고라와 그를 지지하던 250명의 족장들의 죽음을 기억해보라(16).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참으로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32-34]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 . . .

본문은 말한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이는] 너희가 갇힌 자[나의 갇힘들]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하늘에 있는]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빛을 받은 후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뜻이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 믿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경험하였고 그 싸움에서 잘 참았었다. 믿음의 길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교훈한 바이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14:2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다(딤후 3:12). 바울 자신은 많은 고난을 받았다(고전 4:9-13; 고후 11:23-27).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 믿는 일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환난을 당했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 더 낫고 영구한 기업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옥에 갇힌 주의 종들을 동정했고 자기들의 재산과 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꺼이 당하였다. 천국을 확신하는 자는 고난을 참을 수 있다.

[35-36]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 . . .

본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해 인내가 필요함이니라].” ‘담대함이라는 원어(파르레시아)담대함, 담력, 확신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며 믿음의 담력과 확신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붙잡으라고 권면하고 격려한다. ‘큰 상이란 믿음의 결과로 얻게 되는 구원과 천국의 영광을 가리킨다. 성도의 믿음의 걸음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믿음은 인내를 통해 온전케 된다. 특히 환난의 시대에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인내가 함께 필요하다(13:10; 14:12).

[37-39]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이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생략)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하셨음이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잠시 잠깐 후라는 표현은 인간편에서의 표현이 아니고 하나님편에서, 주님편에서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속히 오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께서는 3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세 번째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22:7, 12, 20).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성경의 원리이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이었다(3). 뒤로 물러가는 것은 불신앙이다. 불신앙은 멸망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을 가져온다. 주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다(16:15-16).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26절부터 3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복음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고의적으로 계속 범죄하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중생한 자는 실제로 배교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고는 필요하다. 사실, 거듭난 자들만 이 경고를 듣고 죄를 버리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경고를 듣지 않고 회개치 않는 자는 결국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고를 듣는 자들이 되어서 자발적으로,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지 말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 굳세게, 더 풍성히 소유하는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과거의 믿음의 걸음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과거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지키고 고난을 이겨왔는지를 기억하고 또 바른 믿음을 지켰던 선조들의 삶의 역사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고난과 순교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시대에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가 옥중에서 고난을 당했던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을 기억해야 한다. 참된 교회는 옥중 성도들의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고 있음을 기억하자.

셋째로, 우리는 믿음의 담력과 확신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참아야 한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속죄사역, 그를 믿음으로 얻은 죄사함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굳게 믿고 또 하나님의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몸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신하고 담력과 확신과 인내심을 가지고 살아가자.

[레위기 16장 좋은 성경 말씀] 속죄일 규례(레 16:1-34)

 

[레위기 16장 좋은 성경 말씀] 속죄일 규례(레 16:1-34)

레위기 16장에서는 대속죄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속죄일의 규례를 주시면서 아사셀 염소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두 염소를 준비하는데 제비를 뽑아서 한 마리는 여호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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