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고난주간 주일설교] 두 강도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마 27:20-49)

기혼샘 2024. 3. 1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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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장 고난주간 주일설교 말씀은 예수님이 두 강도와 십자가에 달린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메고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렸는데 양 옆에는 두 죄인인 강도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당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었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한 주를 보내야 합니다.

 

두 강도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마 27:20-49)

 

. 십자가에 못 박히심 27:30-49

이 본문에선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이 나타난다.

1. 우리 주 예수께서 사형을 당하신 곳(33,35)

(1) 그들은 예루살렘과 인접해 있는 '골고다'라는 곳으로 갔는데 아마도 이곳은 대개 사형을 집행하는 장소를 쓰였던 것 같다. 죄수들이 국가의 공의에 의해 희생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희생되신 것이다. 혹자는 이곳이 '해골의 곳'으로 불렸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곳이 대개 해골을 쌓아 두는 곳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것은 죽은 사람들의 뼈와 해골들이 쌓여 있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다 이런 것들을 쌓아 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만짐으로 인하여 부정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사망의 권세를 멸하셨을 때, 그는 당당하게 사망을 이기심으로 그의 승리를 더욱 값지게 하셨다.

(2) 그들은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35). 그들은 그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 그 십자가를 세움으로써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죄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견뎌낸 그 격심한 고통을 마음속으로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주목하면서 그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해야만 한다.

2. 로마 군병들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동(34-44)

그들은 그렇게 위대한 죽음이 당연하기나 한 것처럼 그 죽음을 더욱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의 죽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는지 알아 보자.

(1) 포도주를 마시게 함으로써(34) : 그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그에게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사형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한 잔의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마실 잔에다 초와 쓸개를 타서 그 포도주를 시고 쓰게 만들었다. 그는 가장 나쁜 포도주를 '맛보시고' 그의 입으로 쓴 맛을 느끼셨다. 즉 그는 지금 상당한 고통 가운데서 죽음을 맛보고 계신 것이었다. 그는 최고의 고통을 맛보시기 위해서 그 포도주를 마시기를 거절하셨다. 그는 고통을 줄게 해주는 진통제와 같은 것을 취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느끼면서 죽고자 했기 때문이다.

(2) 예수의 옷을 나눔으로써(35) :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의 옷을 벗겼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안락을 포기해야 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인내로 참아야만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옷을 벗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의 옷을 벗길 수 있다 해도 우리의 가장 큰 위로까지 벗길 수는 없으며 또 우리의 찬양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처형되는 사람의 옷은 처형을 집행하는 자의 수고비로 주어졌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네 명의 로마 군병들이 고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각기 자기의 몫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상의를 넷으로 나누게 될 경우 그 상의는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소용이 없게 되므로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 상의를 차지하기로 동의했다.

아마도 그들은 그의 옷가를 만져서 치료받은 사람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므로 그 옷이 마술적인 효력을 가진 귀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제비를 뽑음으로써 오락을 즐기려 했을 것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주사위 놀음으로 옷을 차지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 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저 유명한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하여 처음 인용된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저희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8).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자기의 영광을 포기하신 것이다.

그들은 이제 '거기 앉아 지켰다'(36).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되고 있었다. 곧 그를 지키도록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완전한 증인들이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그들 자신의 고귀한 신앙 고백을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3) 그의 머리 위에 써붙인 '죄패'에 의해(37) : 죄수들 앞에서 그들의 죄를 큰 소리로 밝히는 것뿐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 죄가 무엇인지를 알리려고 머리 위에다 죄명을 써붙였던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한 죄패를 붙여 놓았다. 이 죄패에는 그에 대한 어떤 죄목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때 붙여졌던 것은 그가 거짓 구세주이거나 자칭 왕이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이는 구세주이신 예수'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그것은 분명 죄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한 것도 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아가 유대인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에 관한 매우 영광스러운 진리가 주장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유대인의 왕 예수' 곧 유대인들이 기대해 왔으며 또 복종했어야 할 왕 예수라는 것이었다.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죄수로 고소하기보다는 한 왕으로 선포했으며 그것도 세 가지 명패로 세 번씩이나 선포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게 하면서 그것을 통해 그 자신의 목적을 섬기게 하신다.

(4) 그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죄수들을 통해서(38) :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로마 군병들의 경비를 받으며 '예수와 함께 강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다. 강도란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노상 강도들이었다. 아마도 이 날이 그들의 처형 날자로 지정되었던 것 같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성경 말씀은 이 일을 통해서도 성취되었다.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53:12). (1) 그가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은 그에 대한 모욕이었다. 마치 그가 가장 비열한 행악자들과 함께 죄를 범하기나 한 것처럼 그는 그들과 함께 저주를 받게 되었다.

우리가 죽을 때 성도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도록 하시기 위해 그는 죽음을 당할 때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던 것이다. (2) 마치 그가 셋 중에서 가장 악한 죄인 곧 주범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의 한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은 그에게 더 많은 모욕을 주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 사람 중 가운데 있는 사람이 우두머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전개되었다. 이는 마치 위대하신 구주께서 모든 죄인 가운데 가장 큰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 일 또한 이 행악자들의 비명과 신음 소리와 모독을 통해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어지럽히고 불안에 빠지도록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신 것은 이처럼 그들의 불행을 직접 맛보려고 한 것이었다.

(5) 유대인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리스도에게 욕설을 퍼붓게 함으로써(39-44) : 어떤 사람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에게 가장 잔악한 행동을 자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무리 파렴치한 사람이라 해도 그에게는 동정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록된 바에 의하면 '호산나'라고 외쳐댔던 그리스도의 지지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감히 그에게 존경을 표하려 하지 않았다.

1) 지나가는 일반 백성들이 예수를 욕했다(39). 그가 아무리 심한 불행을 당하고 또 그 불행을 모범적으로 견디고 있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측은하게 여기지 않았다. 큰 소란을 피워 그리스도를 이 지경에 빠뜨린 그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 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를 책망한 것이 잘하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욕했다.

그를 욕했던 사람들 : 지나가는 자들 곧 길 가던 여행자들이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의 하수인들이 퍼뜨린 소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대한 그릇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각처에서 비방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사건들이 좋은 평판을 유지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기 쉬우므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제일 먼저 비난하기 십상이다.

그들이 경멸의 표시로 나타냈던 몸짓 : 머리를 흔들며. 이는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의기양양하여 그에게 모욕을 주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했던 욕설과 야유 :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었다.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전을 헐겠다고 말한 것 때문에 그를 비난했다(40). 대제사장들은 사람들이 그를 증오하도록 그가 성전을 헐려한다고 백성들에게 열심히 퍼뜨리고 다녔다. 그것은 어떤 것보다 더 백성들로 하여금 그에게 분노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비난하려 했다. "그 거대하고 튼튼한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 힘을 사용하여 그 '십자가'를 뽑고 못 들을 빼내어서 너 자신을 구원하라. 만일 너에게 너의 자랑하는 힘이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힘을 발휘하여 네가 한 말을 증명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고후 13:4) 그것은 그들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 되시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둘째, 그들은 그가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에 그를 비난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마귀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했을 때(4:3, 6)하던 말을 하면서 마귀가 하던 공격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들은 지금이 아니면 결코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이 이미 역사했던 기적을 통해 그 사실에 대해 입증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자주 언급했었던 그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그가 그 사실을 완전하게 입증하겠다고 한 것을 기다리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지나간 것에 대해 적절히 기억하며 또한 앞으로 더 많이 일어나게 될 것에 대해 꾸준히 기대하지 않고 다만 현재의 상황만을 보고 판단하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2)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했다(41). 그들은 폭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욕설을 퍼붓도록 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전에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날은 무교절의 첫째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주 예수의 사형을 집행하는 이곳까지 와서 그에게 독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들이 이처럼 그리스도를 멸시하기 위하여 비방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께 영광을 돌리는 무리들과 함께 모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비난받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두 가지 일로 그리스도를 비난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비난했다(42). 첫째, 그들은 그가 자기를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주장한 구원의 권세도 당연히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고자 했기 때문에 실제로 자기를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둘째, 그들은 그리스도가 지금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겠다고 한 그의 모든 주장들이 속임수와 기만에 불과하다고 빗대어 말하고자 했다. 셋째,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이스라엘의 왕이로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비난했다. 만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만 했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 '이스라엘 왕'을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그것은 십자가가 없을 경우 그리스도도 면류관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이 세상에서 함께 못 박혔기 때문이다. 넷째, 그들은 그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변함없는 사랑과 결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시험을 이기고 그 자신을 굳게 지켰다. 그 결과 그는 실패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다섯째, 그들은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올 경우 그를 믿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그들이 전에 그에게 표적을 구했을 때 그들에게 줄 표적은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큰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무덤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스스로 규정해 놓은 그런 믿음의 방편들과 동기들을 소유해야만 믿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기만하는 큰 잘못일 뿐 아니라 패역한 불신앙을 감추려는 서투른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고자 하지 않으셨다는 것으로 비난했다(43).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르는 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하게 된다(9:10).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기만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일 경우 그가 이런 불행에 빠지지 않았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런 불행에 빠지는 것도 원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이는 그를 중상하려는 것이며 또 구경군들로 하여금 그를 사기꾼이나 협잡꾼으로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둘째, 이는 그를 두렵게 하고 또 그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의 권능과 사랑을 불신케 하고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3) 그리스도가 그렇게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도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은 마치 그와 비교하여 성자들이나 되는 것처럼 그가 받았던 것과 같은 욕설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조차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욕하였다.' 즉 그들 중 한 죄수는 '네가 만일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29)고 말했던 것이다. 혹자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도둑만큼은 그리스도를 욕할 수 없었던 사람이며 또한 욕해서도 안되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주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행해진 악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자 고난을 당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는 가장 악한 사람에게 행해질 수 있는 최악의 수치를 받는 데 복종하셨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었으며 또 이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절규(45-47)

우리 주 예수께서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서 한창 상처와 수치를 당하고 있었다. 이에 관하여 다음의 내용들을 살펴보자.

(1) 이 현상은 어떻게 나타났나. 이것은 세 시간 동안 계속된 예외적이고 기적적인 일식에 의해 나타났다. 특별한 빛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린 것과 마찬가지로(2:2) 특별한 어두움이 그의 죽음을 통지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빛'이 되시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어두움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게 욕을 하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하여 발생되었다. 그들의 마음이 변화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세 시간 뒤 어두움이 사라질 때까지 이 어두움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의혹을 품으면서 서 있었다. 그런 다음(47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들은 역병이 끝났을 때의 바로처럼 그 마음이 강퍅해졌다. 그러나 이 어두움 속에는 본래 다음과 같은 의도가 깔려 있었다. (1)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현재 어두움의 권세와 싸우고 계시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어두움의 땅에서 어두움의 권세자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움의 권세자들에게 이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대적할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내주신다. 즉 그는 그들로 하여금 바람과 태양을 취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는 대적자의 의도를 좌절시키고 결국에는 정복자보다 더 위대한 분이 되신다.

(2) 그것은 그가 지금 하늘의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어두움은 우리 주 예수의 영혼 속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태양이 비치도록 하신다. 그러나 우리 구주는 우리를 위하여 죄인이 되셨으면서도 태양 빛조차 받지 못하셨다. 땅에 그에게 시원한 물 한 방울 주지 않았으며 하늘도 그에게 한 줄기의 햇살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구원하시려고 몸소 고난의 한가운데를 거니셨으나 아무런 빛도 받지 못하셨던 것이다. 이 어두움이 계속되었던 세 시간 동안 그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그의 영혼 속에 침잠한 채 이때를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인간을 창조한 이래로 그처럼 어둡고 두려운 광경이 세 시간이나 계속된 적은 결코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구속과 구원을 위한 위대한 사건의 고비였다.

(2) 그는 그 어두움 가운데서 어떻게 절규하셨나(46). 그가 절규한 것은 이제 구시 즈음이었다.' 이것은 곧 오랜 정적 후 어두움이 걷히기 시작하던 때를 말한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 말은 수리아 말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의 원수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었다. 즉 그들은 '엘리'라는 말을 '엘리야'로 해석했던 것이다. 이제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1) 그는 어디에서 이 절규를 인용하셨나. 그는 이 말씀을 시편 22:1에서 인용하셨다. 그는 이 말뿐 아니라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한 말씀도 다윗의 시편에서 인용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의 유익함을 가르치고 또 우리의 약함을 인하여 기도하도록 명령하기 위해서이다.

2) 그는 이 말을 어떻게 나타내셨다. 그는 '크게 소리질렀다'. 이것은 그의 고통이 극에 달했으며 이제 그에게 본능적인 힘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간청을 통해 그의 영혼의 성실성을 느낄 수 있다.

3) 그 절규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상한 절규를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확신하는 바로는 예수께서는 항상 기뻐하셨던 분이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셨다. 달리 말해서 그는 자신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10:15)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가 이렇듯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도 버림을 받아야 하는 것을 어찌 된 일인가! 분명 이와 같은 절규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불행도 다시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절규로 말미암아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주목해 보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고난을 받으셨을 때 한 동안 그의 아버지에 의해 버림을 받으셨다. 그래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이와 같은 절규를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마치 그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사랑과 그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줄어든 것처럼 말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벼렸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신 다음 그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내기 위하여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를 구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어떤 천사도 보내지 않았으며 지상에서는 그를 위하는 지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처음 영혼의 고통을 받았을 때 그는 '하늘에서'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나는 '소리'를 들었다. 즉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번민하고 있었을 때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용기를 주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얼굴을 감추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죄인이 되어 저주를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들로서 사랑하셨지만 죄의 담보물인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은 그가 당한 고난 가운데 가장 비참한 고난이었다. 그는 바로 이때 가장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와 멀리 떨어져 있자 그는 이처럼 큰 소리로 부르짖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고통과 불행 속에 독초와 쓴 쑥을 넣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처럼 그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에도 그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붙잡았다. 그리하여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당신이 나를 버렸다 해도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고난의 심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견디게 해 주었으며 그에게 힘을 주었다. 또한 그는 이제 이러한 사실을 굳게 간직했던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의 이 불행을 어떻게 욕하고 조롱했나(47). 그들은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말했다. 혹자는 이것이 '엘리 엘리'의 뜻을 몰라 잘못 해석한 로마 군병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 비난은 심각한 오해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다. 건성으로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듣고 있는 것을 왜곡시키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일부 유대인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저질러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를 학대하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결과 피조물을 신뢰하게 되었다고 오인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한 사람들이 드리는 가장 경건한 헌신이 참람한 말로 비웃는 자들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고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지만 이처럼 비방을 당했다.

4. 그의 원수들의 냉대(48,49)

(1) 어떤 사람이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였다(48) : 그는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그리스도를 소생시키고 그의 기운을 북돋기 위하여 약간의 물이라도 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이처럼 그리스도를 괴롭혔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신 포도주를 가져왔다.

(2)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괴롭히고 학대하려 했던 사람들은 그가 '엘리'라고 한 말을 '엘리야'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49).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한 말이다. "잠깐, 그를 홀로 내버려 두라. 그가 엘리야에게 호소했으니 엘리야에게 구하도록 하라."

[종려주일 설교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갈 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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