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로마서 6장 주석 성경말씀] 칭의의 열매인 성화 구원(롬 6:1-23)

기혼샘 2024. 3. 1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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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주석 성경말씀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성화 구원의 열매가 있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화 구원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칭의의 열매인 성화 구원(롬 6:1-23)

 

Ⅰ.칭의의 열매로서의 성화 6:1-23

사도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1)라는 말로써 주제가 다른 본 강론을 앞의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용서하시는 가운데서 더욱더 크게 드러날 것이니 우리가 용기를 내어 죄를 지어야 하겠느냐는 것이다. 사도는 그러한 생각을 해선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조금이라도 은근히 죄를 장려하는 견해들은 철저히 혐오를 받고 물리쳐야 한다. 사도는 본 장에서 매우 절실하게 성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본장은 두 가지 즉 성화에 대한 권고와 그 권고를 뒷받침하는 논증으로 나눌 수 있다.

1. 성화의 특성(1-19)

성화에는 죽음의 소생의 두 가지 특성 즉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사는 면이 있다.

[1] 성화는 죽음 곧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1) 죄에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아무도 죄 없이 살수는 없을지라도 죄 가운데서 살지 않을 수는 있다. (2) 죄의 몸이 멸하여(6). 죄의 몸이란 우리 속에 들어있는 부패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도끼로 찍어내야 하는 뿌리이다. 우리는 죄의 행위들을 그만 두어야 할뿐만 아니라 악한 습관과 성향을 약화시키고 없애야 한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서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7).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죄의 몸이다. 그러니 이것을 부셔버리라. 그러면 그 명예가 깨어지고 말 것이다. (3)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11). 압제자의 죽음이 해방을 의미하는 것처럼 압제받는 자의 죽음은 더욱더 그러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즉 더 이상 죄의 뜻대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는 살았을 때의 친구들과 헤어지기 마련이다. 죽음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그런데 성화는 그와 같은 변화를 심령에 일으키며 죄와의 모든 왕래를 단절시킨다. (4) 그러므로 죄로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2). 비록 죄가 법의 방치자처럼 잔존할 수 있을지라도 왕처럼 군림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죄가 법이 되도록 하여 우리가 그것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때때로 죄에 기습을 당하고 압도될지라도 결코 죄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몸의 사욕을. 많은 죄가 육신을 만족시키는데서 생긴다. '너희 죽을 몸' 이라는 말속에는 한 가지 뜻이 담겨 있다. 곧 우리의 몸을 죽게 만든 것이 바로 죄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와 같은 원수에게 복종하지 말라는 것이다. (5)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려서는 안 된다(13). 몸의 지체는 타락한 본성에 의해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오용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기 마련이다. 죄란 마치 밀어닥치는 파도와 같아. 그러므로 거기에 휩쓸리기 전에 먼저 피해야 한다. 혹시 몸의 지체를 죄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라. 거기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 곧 성화의 한 면이다.

[2] 소생이란 즉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곧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4). 생활의 새로움이란 마음의 새로움을 전제로 한다. 샘을 깨끗하게 하지 않고서는 시냇물을 맑게 할 도리가 없다. 새 법칙을 따라 행하라. 방향을 새로 잡으라. 걸어 갈 새로운 길을, 쫓아 갈 새로운 지도자를 함께 갈 새로운 벗을 택하라. 그것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이다(11).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를 존중하며 그를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는 애정과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다"(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생활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위하여 살며 그의 말씀과 뜻을 우리의 법칙으로 삼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생명이시다.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길이란 없다. 그리스도는 중보자이시다. 주 예수의 중재에 의하지 않고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영혼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는'것이다(13). 성화의 생명과 본질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는 데 있다. 즉 그 본질은 자신을 주께 드리는 데(고후 8:5)있다. "그에게 너의 재산이 아니라 네 자신을 드려라. 참으로 너의 전체를 드려라. 그에게 복종할 뿐만 아니라 그를 좇으라. 언제든지 그를 섬길 준비를 하고 있으라. 도장의 어떠한 자국이든지 받아들이는 밀랍(wax)처럼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갖고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죽은 시체를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조롱하는 행위이다. "너희 자신을 살아서 무슨 일인가에 유익한 자로 즉 '산 제물'(12:1)드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생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은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 몸의 지체는 죄를 섬기는 데서 물러난 지금 게으르게 누워 있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히 사용되어야 한다. 몸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영혼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19).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이는 지체를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명령과 지도 아래 복종시키라는 말씀이다." '의에게거룩함에'라는 말은 기초가 잡히고 성장하며 전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죄악적인 행동이 죄악적인 습관을 굳히고 본성으로 하여금 더욱더 죄를 짓기 쉽게 만드는 것처럼 모든 은혜로운 행동은 은혜로운 습관을 굳힌다. 한 가지 의무의 이행은 또 다른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면 일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많이 얻게 된다.

2. 성화의 필요성(1-23)

우리의 마음속에는 날 때부터 거룩함에 대한 반감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거룩함에 복종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1] 세례는 왜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이유를 그 속에 담고 있다. 다음의 추론을 살펴보자.

1)일반적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2). 세례는 우리가 죄의 나라에서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서 죄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죄 안에서 행한다면 이 모든 것이 무익하게 되고 만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돌아다니는 유령처럼 이미 죽었던 데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났기'(7)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죄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풀려 나온 노예상태로 되돌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하겠는가?

2)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3) 것이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킨다. 특별히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세례에 대한 신앙 고백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이 고백에 부응하지 않고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접붙여진 줄기가 접붙은 나무와 연합하여 어린 가지의 모양과 그 나무의 성질을 이어받듯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고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다(5).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포도원에 심겨졌다. 우리는 우리가 그를 본받아 간다는 것을 성화를 통하여 증거 해 보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우리의 선조는 여러 가지 내용들 중에서 특히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상 세례란 이상의 각각의 경우에서 그리스도와의 성례전적인 연합을 말한다. 첫째,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6).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란 서서히 이루어지지만 철저하게 죽는 죽음이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죄의 죽음도 그와 같다. 그것은 저주받은 죽음이었다. 죄는 파괴만을 일삼는 악인처럼 비참하게 죽는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 둘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8). 그리스도는 죽음에 복종하셨다. 그가 죽으셨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의미하고 증거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죽되 그리스도께서 죄와 함께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와 함께 죽은 것이다. 셋째, 우리가…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4).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완전하다. 우리는 신앙을 고백함으로 죄와의 모든 거래와 교제에서 끊어졌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죄와 죄인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의 것이므로 죄에서 끊어졌다는 보증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새롭고 더욱 거룩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시기 위해 장사된 것처럼 우리도 믿음과 사랑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 세례 안에서 장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하고(5). 그와 함께 사는(8) 이 모본을 따르게 된다. 회심은 죄의 죽음으로부터 의의 생명에로 살아나는 첫 번째 부활이다. 이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일치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야 한다. 첫째, 그는 다시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나셨다(9). 이제 다시는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할 수 없다. 그는 실제로 죽으셨으나 살아나셨고 그렇게 영원히 사신다. 그와 같이 우리도 죄의 무덤에서 살아나 다시는 그리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둘째,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하여(10). 하늘의 삶을 살기 위하여 살아나셨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니'(17:11).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하여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새 생명(4)으로서, 우리가 이전에 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른 목적을 가지고 다른 법칙을 따라 사는 삶이다. 하나님께 헌신한 삶이 곧 새 생명이다. 전에는 자기가 가장 중요한 최고의 목적이었으나 이제는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신 것이다.

[2] 사도는 새 언약의 귀중한 약속에 대해 언급한다(14). 죄가 우리에게 너무 힘든 상대이므로 우리가 죄를 이길 수는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도는 "너희는 지금 쉽게 다룰 수 있고 복종시킬 수 있는 적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적은 이미 싸움에 실패하고 좌절당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죄가 산자의 마음속에서 버둥거리며 그에게 많은 고민을 불러일으키므로 그를 괴롭힐 수가 있다. 그러나 그를 주관하지는 못한다. '이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즉 죽음과 죄의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 주인과 새 법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가 짚은 주지 않으면서 벽돌을 요구하는 행위언약 아래 있지 않고 우리의 진심을 복음의 완전으로서 받아주며 이 언약이 성취할 수 있는 힘을 약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은혜언약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 은혜언약은 우리의 구원을 우리 손에 맡겨두지 아니하고,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책임지시며 친히 그 죄를 저주하고 파괴하신 중보자의 손에 맡겨 둔다. 그리스도께서는 은혜의 자발적인 마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여지를 남겨두며 회개를 근거로 하여 용서를 약속하는 은혜아래 있다. 그런 우리가 그처럼 풍성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거스리고 죄를 지으며 그러한 사랑을 악용할 수 있겠는가? 사도는 그 같은 생각에 얼마나 경악을 금치 못하는가를 보라(15).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3] 이것은 우리에게 유리하든지 불리하든지간에 우리의 상태를 나타내는 증거가 될 것이다(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종으로 있든지 아니면 죄의 종으로 있다. 우리는 이 주인들 중에 누구에게 우리의 순종을 바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 곧 우리가 필연적으로 죽음이 따르는 가문에 속해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복종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문에 속해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4] 사도는 사람들의 이전 죄악상에 대해 언급한다(17-21).

1)그의 이전의 상태와 행했던 일.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이 스스로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기 위하여 그들이 죄의 종으로 있었던 때를 기억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봉사하기를 그만두었으며, 일단 진정으로 그 일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바친 사람들 중 아무도 다시는 옛날 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죄를 섬기는 일이 큰 수치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 그랬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즉 우리가 그것을 과거의 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19). 몸이 끊임없이 힘들게 죄를 짓는 일에 사용된다는 것이야말로 죄에 빠진 상태의 비참함이다.

너희가…드려. 죄인들은 자발적으로 죄를 섬긴다. 만일 그들이 죄를 섬기는 일에 자신들 드리지 않았다면 마귀가 억지로 그들을 그 일에 끌어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행위로서의 불법에서 삯으로서의 불법에 이른다는 말이다. 악을 행하고서 그 몇 배의 재앙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더욱더 악해지고 더욱더 강팍해진다. 바울은 이 사실을 사람의 예대로 말하고 있다. 너희가…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20). 이것은 조금이라도 누구에게서 받은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취한 자유로서 곧 방종이다. 그러나 의로부터의 자유란 실상은 최악의 노예상태이다.

2)어떻게 복스러운 변화가 일어났으며 변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너희가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17). 이것은 우리의 회심 즉 복음에 대한 우리의 복종과 순응을 묘사하는 말씀이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교훈의 본'이란 곧 은혜의 법칙을 말한다. 복음은 도장이고 은혜는 그 도장의 날인이다. 둘째, 그 법칙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이란 복종하되 마음으로 복종해야 할 교훈이다. 다시 말해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능력으로 즉 우리를 지배하는 부분인 마음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복종한다는 것은 밀랍이 주조를 안으로 부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밀랍이 도장에 찍혀져 그 새겨진 모양을 따라 그대로 들어내는 것과 같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 즉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22). 회심은 첫째, 죄를 섬기는 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살거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의 세력과 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3)그들이 이제는 그들의 이전 행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사도는 여기서 그들이 과거에 죄를 섬긴 일이 무익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를 그들 자신에게 물어본다(21). 너희가 그때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는 대체 너희가 그 일로 무엇이라도 얻은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장차 겪게 될 엄청난 손실 외에도 현재 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이라는 것 또한 언급할 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21). 사실 열매라는 이름을 가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음으로 그는 그들이 그 일이 부당한 것을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를 그들에게 묻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는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부끄러움은 죄와 함께 세상에 들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죄로부터 생겨난다. 조만간에 틀림없이 부끄러워할 일을 누가 굳이 하려고 하겠는가?

[5] 사도는 모든 일의 결국을 말한다. 그는 우리를 죄로부터 거룩함에 이르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우리 앞에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을 제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죄의 결국은 사망이다(21).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비록 그 길이 즐겁고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고통스럽게 될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23). 삯이 종에게 당연한 것처럼 죽음은 죄인에게 마땅한 것이다. 죄의 종으로서 죄의 일을 하는 자들은 누구나 그와 같은 삯을 받을 것을 기대해야 한다. 그 열매가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라면 그 결국은 영원한 생명일 것이다. 이는 참으로 행복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 길이 힘들지라도 그것은 마침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23).

천국이 곧 생명이다. 그것은 어떠한 병도 따르지 않고 어떤 죽음도 그 생명을 종식시키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죽음은 죄의 삯이나 생명은 선물이다. 죄인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자기의 죄과 때문이지만 성도들이 천국에 가는 것은 자기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이를지라도 우리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선물을 마련해 놓으시고 그것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시며 그것을 얻기까지 우리를 보존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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