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장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전에 삭개오를 구원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부정한 사람입니다. 구원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리고로 들어가서 삭개오를 불러 구원시킵니다. 인간의 눈과 하나님의 눈은 다릅니다. 삭개오는 창세전에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도 창세전에 선택받아 구원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심(눅 19:1-48)
1-10절, 삭개오를 구원하심
[1-3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예수께서는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셨다. 이 일은 여리고 성 안에서 된 일인 것 같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며 또 부자이었다. 세리는 로마 정부의 관리로서 세금을 징수하는 공무원이고 세리장은 그들의 우두머리이다. 당시에 세리는 죄인으로 취급되었다(7절). 그것은 그들에게 불법한 일이 많았음을 암시한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돈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가 어렵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눅 18:24).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누구든지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상종하지 못할 자로 여기며 그를 멀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다.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신 것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약간 알고 있었고 끌리고 있었고 그것을 확인해 보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부족한 점과 주위 사람들의 장애 때문에 주께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4-5절]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삭개오는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진행하는 길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아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꼭 보아야겠다는 열심이 있었다.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그의 신분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움이나 체면이나 혹은 나무에서 떨어지면 다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뽕나무에 올라갔다. ‘뽕나무’라는 원어(쉬코모라이아--전통본문)는 ‘시카모 무화과’ 혹은 ‘무화과 뽕나무’라는 말이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그 뽕나무 아래에 도달하셨을 때 그를 우러러 보시며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인다. 그는 그의 신성(神性)의 지식으로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다. 그는 오늘날도 우리 모두의 이름을 아시고 구원하실 자들의 이름을 다 아신다. 그는 죄인들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또 삭개오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 가정적 구원은 확실히 큰복이다.
[6-7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은 삭개오에게 너무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아마 그의 생각에, 거룩하신 예수께서는 자기를 상대해주지 않으시고 자기를 대면하시면 필경 책망하실 것 같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책망 대신 자기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그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다. 그의 이런 반응을 보면, 그는 예수께서 메시아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 자기 이름을 불러 주시고 자기 집에 들어와 주신다니 그의 마음은 더욱 감동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에 관하여 수군거렸다. 사람은 상대방의 행위의 동기를 알지 못하고 수군거리는 일을 잘한다.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죄인과 친구가 되어 그의 죄를 인정하거나 그와 함께 죄의 낙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직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우리 자신의 제한된 생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였다. ‘주님’이라는 명칭은 단순한 존칭 이상의 뜻이 있어 보인다. 사실, 그 명칭은 구약시대의 ‘여호와’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신성(神性)의 명칭으로 보인다. 그는 또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며 만일 남의 것을 억지로 혹은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고백은 바른 회개를 보인다. 참된 회개는 죄의 청산이다. 예수님 앞에 선 삭개오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적 감화와 성령의 내면적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9-1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人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삭개오에게 가정적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셨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었고 죄를 청산하기를 결심하였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청산하기를 원하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인자(人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단지 사람들의 병들을 고쳐주거나 기적들을 행하기 위하심이 아니고, 죄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심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을 바르게 이해하고 우리도 그 사명을 이어받자.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죄인 삭개오를 먼저 찾아오셨고 그 집에 들어가셨고 마침내 그를 구원하셨다. 예수님의 주관심은 영혼 구원이었고, 그의 사명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그는 마태복음 9:13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또 마태복음 20:28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오늘날 교회의 사명이며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이것이 교회의 주관심이어야 하고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사명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한 명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힘쓰자. 오늘날도 주께서는 성령으로 우리를 통해 죄인들을 찾으시며 만나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둘째로, 죄인들은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해 들었고 생각하였고 만나 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는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고 예수님을 에워싼 무리는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생각을 주셨다. 그것은 무리를 앞서 달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는 체면을 고려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시고 그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시자 그는 급히 내려와 즐거이 그를 집에 영접하였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죄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오늘날 죄인들은 성경을 통하여, 즉 개인적 성경 읽기나 교회에서 성경적 설교나 교훈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끝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했다(요 20:30-31). 누가는 사도행전 17:11-12에서,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로마서 10:17에서 말했고, 또 디모데후서 3:15에서는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했다.
셋째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삭개오는 자기 소유[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누구에게 토색한 것 즉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나 갚아주겠다고 말했다. 구제는 세상 사랑, 재물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천국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표시이다. 세상 사랑을 끊은 자가 아니면 그 귀한 물질을 가지고 구제할 수 없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자와 통치자와 심판자이심을 믿고 세상의 것들은 헛되고 천국은 영원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죄악된 행위들을 버려야 한다. 참된 회개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뜻이다.
11-27절, 열 므나의 비유
[11-12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삭개오에 대해 하신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그는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셨다. 그가 이 비유를 하신 까닭은 자기가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왔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임할 것이지만,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날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영적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이 신약교회이지만,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영광스럽게 드러나고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갔다. ‘왕위’라는 원어(바실레이아)는 ‘왕국’(나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어떤 귀인으로 표현하셨다. 그는 지극히 존귀하신 분,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요 1:1, 14). 그는 왕으로 오셨으나 아직 본격적으로 왕으로서 통치를 하지 않으신다. 물론 지금 그가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서 교회를 다스리고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지만, 그는 장차 다시 오심으로 그의 왕 되심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영광과 능력의 왕이심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위해 먼 나라로 가실 것으로 표현하셨다. 그가 부활 승천하셔서 가신 천국, 그가 지금 계신 그 천국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며 그가 왕위를 받아 왕의 영광을 가지고 돌아오시기까지는 아직도 여러 해가 걸릴 것 같다.
[13-14절]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그 귀인은 그 종 열 명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말하였다. ‘그 열 명의 종들’은 그의 모든 제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그 종들의 재능대로 어떤 이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이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동일하게 한 므나씩을 주었다. 한 달란트는 60므나이며, 한 므나는 100데나리온, 즉 노동자의 100일 품삯이었다.
그 귀인은 그 종들에게 동일하게 한 므나씩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명하였다. 한 므나는 동일한 재능과 임무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주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재능과 임무를 가리킬 것이다. 장사하는 것은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주신 임무에 충성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귀인이 돌아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켰다. 주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상당한 재능과 임무를 주셔서 주의 재림의 날까지 선한 일에 힘쓰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참 교회를 건립하는 일에 충성하게 하셨다(마 28:20).
그런데 그 백성은 그 귀인을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말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그 백성은 인류를 가리킨 것 같다. 인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 적대적이다. 심지어 구약교회나 신약교회 조차도 때때로 배교적이고 불신앙적이며 불순종적이었다. 이것은 무지하고 죄악된 인간의 본모습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이 변하지 않고서는, 이 인간의 무지하고 반항적인 본성의 병폐는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15-17절]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귀인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불렀다. 주 예수께서는 영광 가운데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미래의 확실한 사건이다. 다시 오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불러 그들이 얼마나 충성되이 일했는지 평가하실 것이다. 재림하신 주께서는 친히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 첫째가 나아와 말했다.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말했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비록 한 므나는 장사하기에는 별로 큰 자본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그 종은 그 작은 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 그는 놀지 않았고 다른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주인은 그 첫 번째 종에게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주께서 충성한 제자들에게 내리실 상이다. 그 상은 우리의 충성의 정도에 따라 주어질 것이다.
[18-19절]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두 번째 종도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많이 남겼다. 그는 비록 첫 번째 종처럼 열 므나를 남기지는 못하였지만 다섯 므나나 남겼다. 제자들의 열심과 성실성은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좀더 열심히 일할 것이고 다른 이는 그보다 좀 못할 수도 있다. 또 종들의 일한 정도에 따라 그의 일의 결과도 다를 것이다. 주인은 그 두 번째 종에게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주의 모든 제자들과 교회의 직분자들에게는 그들이 일한 만큼의 상이 주어질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의 행실의 정도에 대해 다른 상급을 말한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전도자]와 물주는 이[목회자]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20-23절]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세 번째 종은 그가 받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었다. 그는 주인에 대해 합당치 않은 생각을 하였다. 종의 임무는 주인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이며 그 외의 것은 그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인에 대해 두려워했고 불평했고 부정적이었고 주인의 명령에 순종치 않았다. 그는 종으로서 합당치 않은 자이었다. 종의 임무를 하지 못한 그는 악한 종이었다. 그가 주인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 은을 은행에 두어 주인이 올 때 이자라도 받게 해야 옳았다. 그 종은 주인에 대해 잘못된 생각과 두려움과 불만을 가진 것뿐 아니라, 또한 지혜가 없었고 게을렀다.
[24-27절]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주께 대한 믿음과 순종과 충성이 있는 자는 상을 받고 더 받을 것이지만, 믿음과 순종과 충성이 없는 자는 심판 날에 그가 가지고 있던 것조차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주인은 또 그의 왕 됨을 원하지 않았던 원수들을 끌어다가 자기 앞에서 죽이게 하였다. 이것은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교인들과 종들의 종말을 가리킨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나 백성이 아니고 원수들이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그를 바깥 어두운 데, 즉 지옥으로 내어쫓으라고 말했다(마 25:30). 그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은 미래에 있다. 주 예수께서는 장차 왕권을 가지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신약교회 안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불완전한 모습으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주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주의 재림의 소망을 굳게 붙들자(계 22:20).
둘째로, 구원받은 성도의 생애는 일하는 기간이다. 본문은 그것을 장사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장사는 이익을 남겨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상당한 재능과 성도로서 행해야 할 임무를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재능과 성도의 임무를 수건에 싸두듯이 싸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활용하여 열심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삶을 살아야 하고 복음을 널리 전하며 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충성해야 한다.
셋째로,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상이며 다른 하나는 벌이다. 있는 자, 곧 믿음과 순종의 열매가 있는 자는 천국에서 그 행한 대로, 그 충성의 정도에 따라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 곧 믿음과 순종의 열매가 없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다. 그도 그 행한 대로, 그의 악함의 정도에 따라 지옥에서 벌을 받을 것이다.
28-48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
[28-30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예수께서 감람원이라는 산에 가까이 오셨을 때 제자 중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신 것은 그가 말씀하실 일에 대한 두 증인의 증거를 보이심이었다. 그가 그 마을에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의 신적 지식을 증거한다. 그는 멀리서도 그 나귀새끼를 아셨다.
예수께서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뜻도 있지만(슥 9:9; 마 21:4-5), 또한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 또 그가 다른 사람의 나귀새끼를 타고 가신 것은 그의 가난한 삶을 보인다. 그는 온 세상의 소유자이셨지만, 세상에서 나귀새끼 한 마리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31-34절]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가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만났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은 예수께서 그 나귀새끼의 참 주인이 되심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그 나귀새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것은 그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이 세상의 참 주인이신가? 우리의 모든 소유의 참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오직 그가 주인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또 그 나귀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35-38절]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하늘 안에, 하늘 아래]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놓거나 예수께서 가시는 길에 펴신 것은 그들의 겸손함과 주님을 향한 경외심을 보인다. 또 모든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능한 일들 즉 기적들을 인해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말했다. 모든 제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의 증인들이며 그 기적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킨다. 예레미야 23:5,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하늘 아래 있는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평안을 메시아로 말미암아 얻게 될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바른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39-40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그 바리새인들은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알고 존경했을지는 몰라도 그를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로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찬송과 고백이 정당함을 증거하셨다. 돌들은 이방인들을 표현한 말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돌 같은 무가치한 자들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주실 수 있다.
[41-44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 그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것은 그 성이 멸망할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이었다. 참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온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되었고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에 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의 날을 내다보셨다. 그것은 주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은 여러 날 포위되고 마침내 함락되었고 그 거민들과 자녀들은 땅에 메어침을 당했고 성전과 집들은 다 무너졌고 불태워졌다.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고 죽인 결과는 비참하였다.
[45-46절]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그 안에서 파는 자들과 사는 자들](전통본문)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그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 안에서 파는 자들과 사는 자들을 내어쫓으셨다. 그는 권위를 가지시고 그렇게 하셨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집이다. 그러나 당시에 성전은 그렇지 못했다. 성전 안에 소나 양들을 파는 자들이 있었다. 성전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제사를 위한 소나 양들을 팔아 이익을 남겼다. 그것은 도적질이나 강도질과 같았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어느 교회가 장로와 권사 같은 직분자들을 세우면서 혹은 병고침을 위해 기도해주면서 헌금을 요구한다면 그것도 강도질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자하신 주께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신 것은 성전을 향한 그의 열심 때문이었다(요 2:17). 성전의 청결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문제이다.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는 것, 교회에서 모든 교리적 오류와 윤리적 오류를 제거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 교회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순수한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47-48절]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예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설교와 가르침은 그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꾀하였다. 단지, 그들은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제자 둘을 보내어 나귀 새끼를 끌고 오게 하시면서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나귀는 주인이 있는 나귀이었다. 33절,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그러나 예수님은 그 나귀의 참 주인이셨다. 예수님은 그 나귀뿐 아니라,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다. 주인이라는 말은 소유자, 통치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 외에 천지만물의 주인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시고 우리 모두의 주인이시다.
둘째로, 예수님은 왕이시다. 모든 제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다. 즉 그는 신적 왕이시다. 그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은 신적인 왕이 메시아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다윗 왕으로 표현된 메시아의 강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영육의 회복이 될 것이다. 그것은 죄사함과 심령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계명을 순종함으로 의와 선을 행하며 서로 사랑함을 실천케 될 것이다. 주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인정하고 고백한 것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 때문이었다. 또 성경은 그의 기적들에 더하여 그의 부활을 그 증거로 추가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그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그가 신적인 왕,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새 세계를 시작하기 위해 오신 신적 구주이시다.
셋째로,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셨고 죽임을 당하셨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고 미워하고 시기했고 배척했고 그를 죽이려고 공모하였고 그 일을 성취하여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다. 요한복음 1:11-12,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이시며 신적 왕이신 그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고 배척했지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요 20:30-31). 아직도 그를 영접지 않은 분은 이제 그를 영접하고 믿으라.
[욥기 29장 주석 성경말씀] 욥-옛날은 복되었다(욥 2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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