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디모데후서 2장 주석 강해설교말씀] 좋은 일꾼(딤후 2:1-26)

기혼샘 2022. 4. 2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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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복음 사역자의 자세와 의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은 사역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충성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분에 충성을 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이 세상을 살면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좋은 일꾼(딤후 2:1-26)

 

1-13,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

[1-2]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장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복음 사역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나 많은 사람이 바른 진리의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고 진실한 일꾼들이 부족하므로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디모데는 더욱 굳게 서서 말씀 증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해서 강해야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은혜이다. 그 은혜 속에서 강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의()를 굳세게 믿고 의지하고 모든 죄를 버리고 마귀의 권세를 담대히 물리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또 디모데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바울에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하였다. 그가 바울에게 들은 바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즉 그의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십자가의 죽음, 그의 부활, 그의 승천 등에 관한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곧 복음에 담긴 내용들이다. 위의 사실들은 많은 증인 앞에서확증된 것들이었다. 기독교 진리는 많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된 역사적 사실들이다. 그것들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믿을 만한 것들이다.

기독교는 꾸며낸 이야기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이나 신화가 아니고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이었다. 예수는 꾸며진 인물이 아니다. 만일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지 않으셨고 기적들을 행하지 않으셨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지 않으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거짓말이 아니었고 많은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해 증거되고 확증된 진리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말한다. ‘충성된 사람들이란 진실하게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는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나 환경여건에 따라 변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항상 자기 위치에서 자기의 맡은 일을 충실하게 행하는 믿을 만한 자이다. 디모데는 자기가 받은 복음을 충성된 자들에게 전수해야 하였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이것은 복음 진리가 후시대에 전달되며 계승되는 방식이다. 이것이 참된 제자 훈련이며 신학 교육이다. 교회는 이런 계승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후대에 전수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 충성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복음 진리를 받고 배워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만한 충성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오늘날도 복음 사역을 위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성경 말씀을 진실하게 믿고 실천하는 자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충성된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3-4]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전통사본)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전통사본에는 없음)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는 충성된 일꾼으로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바울이 많은 고난 중에서 고전분투하며 전도의 일을 하였듯이, 디모데도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전도는 전쟁에, 그리고 전도자는 군인에 비유할 수 있다. 마귀는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전도 사역을 방해하며 전도자들을 핍박한다. 그러므로 전도와 교회 사역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각오하며 수행해야 할 일이다. 전도자들은 군인 정신으로 일해야 한다. 군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훈련이 있으면 언제나 참여해야 하고 비상이 걸리면 언제나 출동해야 한다. 군인은 언제나 출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군인은 몸이 피곤하다거나 가정에 무슨 일이 있다고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군인은 그를 부른 국가를 위해 충성해야 한다. 그들의 충성된 행위와 수고 때문에 국민들은 평안히 생활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일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인이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들을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야 한다. 물론 전도자들이 자기 집을 내버리고 자기 가족들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 집을 돌보는 것도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 주의 일이 첫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5-6]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에 비교한다. 선수들은 규칙들을 지키며 경기를 해야 한다. 달리기 선수들은 트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축구 선수들은 공을 손으로 치거나 상대방 선수를 발로 차는 등의 반칙을 해서는 안 된다. 경기에서 이기려면, 선수들은 반드시 규칙들을 잘 지켜야 한다. 바울은 또 복음 사역자들을 농부들에 비교한다. 농사는 부지런함과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땅을 일구어 고르게 하고 그 위에 씨를 뿌리고 적당하게 물을 공급해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아내고 마침내 잘 익은 곡식들을 추수하기까지 부지런하게 수고하고 뙤약볕에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 농사일이다. 농부들이 이런 수고를 했을 때 곡식을 거두는 기쁨과 복을 누릴 것이다.

[7-9]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을 첫째로 생각해야 하고, 자기 생각과 뜻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씀해주신 규칙대로 행동해야 하고, 또 부지런함과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계시로 받은 복음에서 증거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도 증거된 바이다. 예수께서는, 비록 육신적으로가 아니고 오직 법적으로이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그는 참된 인성을 소유하셨고 그의 죄 없으신 인성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는 고난받는 그의 모든 제자들의 본이 되셨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와 같이, 복음 사역자들이 고난 가운데서 일하지만, 그 결말은 복된 승리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아 고난을 받았고 죄수로 감옥에 갇혔으나, 하나님의 복음은 감금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은 망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망하지 않는다.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제국은 몇 백년이 안 되어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 동안에도 진실한 성도들은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동굴에서 신앙을 지켜 왔다.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탄압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어둘 수 없다. 하나님의 복음은 죄인들을 자유케 하는 복음이며 아무도 그 자유의 복음을 매어둘 수 없다.

[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 사도 바울이 고난 중에도 모든 것을 참은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 이루셔서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구원이다. 죄인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영원한 영광과 함께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영원한 영광을 동반하는 구원임을 뜻한다. 구원은 영광스럽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은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이다. 그것은 의와 선과 진실이 충만한 구원이다. 구원받은 자들이 거하게 될 세계는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며(벧후 3:13),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8:18).

[11-13]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믿을 만하지만 이 말씀은 더욱 믿을 만한 말씀이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주와 함께 살 것이다. 우리가 참으면 또한 그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를 부인한다면 주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10:32-33). 우리의 믿음은 보잘것없고 우리의 마음은 약하지만, 주님은 항상 신실하시며 언제나 믿을 만하시다. 그는 결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고 굳게 믿어야 한다.

복음 사역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로서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 사역자들이 받는 고난의 결과로 택한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구원은 영원하며 영광스럽다.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것은 참되고 믿을 만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목사들과 성도들은 고난을 각오하고 맡은 직분에 충성해야 한다.

1절부터 13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의 종들과 직분자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도적 복음 진리와 교훈들의 계대(繼代)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교회는 시시때때로 충성된 청년들을 불러 성경의 바른 교훈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신학 교육의 사명이다. 셋째로, 주의 종들과 교회직분자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함께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시인하고 참고 주와 함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인정하시고 함께 살고 왕노릇하게 하실 것이다.

14-19, 진리의 말씀과 헛된 말

[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주](전통본문)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복음의 일꾼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각오하고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수고하며 인내할 것을 기억해야 하고 또 말다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일꾼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자라도록 해야 하는 자들인데, 말다툼은 전혀 그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말다툼은 도리어 듣는 자들에게 큰 싸움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를 주어 그들로 시험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말다툼은 마귀가 기뻐할 뿐이다.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진리의 말씀1:13에 말한 ‘바른 말’ 곧 건전하고 유익한 말을 가리키며, 2:2에 언급한 내게 들은 바이며, 2:8에 말한 나의 복음이며, 2:9에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교회가 소유한 하나님의 진리이며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말씀이며 생명을 주는 말씀이다. 교회의 힘은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있다.

하나님의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한다. ‘옳게 분변한다’는 원어(오르도토메오)정확하게 가르친다는 뜻이다(Thayer).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전달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근거 없이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또 어떤 본문을 성경 다른 곳의 명백한 진리와 충돌하게 해석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읽게 되지만, 우리가 점점 성경을 알면 알수록 성경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우선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하고, 각 문장의 뜻을 바르게 해석해야 하며, 또 앞뒤의 문맥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또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성경의 어떤 불명확한 부분들은 명확한 다른 부분들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모든 복음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들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디모데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설함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자기 임무를 다 하는 일꾼이다. 일꾼이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나, 자기 임무를 다하는 일꾼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정된이라는 원어(도키몬)는 ‘시험된, 증명된이라는 뜻을 가진다. 복음 사역자는 설교할 때나 말씀을 가르칠 때 그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서 그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힘쓰라는 말은 바른 말씀의 봉사자가 되는데도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인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믿은 지 오래되어 다른 이들과 어린 성도들을 가르치고 권면해야 할 위치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교훈이 된다. 우리는 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해석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16-17]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망령된이라는 원어(베벨로스)는 ‘속된, 불경건한, 가치 없는’(Thayer, BDAG)이라는 뜻이다. ‘헛된 말이라는 원어(케노포니아)는 ‘헛된 변론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는 그리고 때때로 교회 안에도 망령되고 헛된 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불경건하고 가치 없고 헛된 논쟁들이 그러하다. 주의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보수하고 바르게 해석하며 속되고 헛된 말들, 불경건하고 무가치한 논쟁들은 피하고 끊어버려야 한다. 왜냐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함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은 경건과 믿음에 유익한 말씀이지만, 헛된 말들은 점점 더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나아가게 할 뿐이다.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 ‘독한 창질이라는 원어(강가이나)는 몸의 한 부분이 썩어 다른 부분들까지 썩게 하고 마침내 뼈들까지 썩게 하는 무서운 병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암과 비슷하다.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은 바로 이러한 무서운 병과 같다. 그것을 조기에 발견하여 조치하지 않으면 마침내 온 몸을 버리게 된다. 교회가 이단에 대해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마침내 온 교회가 부패하고 속화될 것이다. 바울은 이단자들의 이름(후메내오와 빌레도)을 언급하였다. 오늘날도 교회를 부패시키는 이단자들의 이름을 분명히 들어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조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불경건하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문제는 진리에 관한 문제이었다. 그들은 진리에 관해 그릇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를 왜곡시키는 오류이다. 만일 그들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헛될 것이다. 과연 어떤 이들은 그들의 말에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부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허물어졌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성경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자들이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 . .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 역사도 신화’(saga) 혹은 전설’(legend)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바르트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오늘날의 후메내오와 빌레도이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대교단들과 우리나라의 몇몇 대교단들이 이런 이단적 사상들을 배격하지 않고 용납하였고, 그래서 오늘날 세계의 다수의 개신교회들은 신학적으로 변질되고 부패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큰 죄요 교회의 불성실이다.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이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 그리고 이단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복음 진리 곧 성경의 근본적 진리들을 말한다고 본다. 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여기에 열거한 진리들은 성경의 기본적 진리들이며 이런 진리들은 다시 닦여져서는 안 된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이 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다. 하나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 택한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6:39). 이단사설들이 많은 세상에서라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바른 진리를 믿고 그 믿음에 굳게 설 것이며 마침내 다 영광스런 구원에 이를 것이다.

또 하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는 모든 성도들은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 불의에서 떠나지 않는 자는 참 성도의 표를 가지지 못한 자이다. 불의는 도덕적 악뿐 아니라, 비진리와 이단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리적, 윤리적 악에서 떠나야 한다.

14절부터 1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불경건한 이단사설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다.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그러하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확신하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 진리들을 다 믿고 교리적 이단사설들과 윤리적 죄악들로부터 떠날 것이다.

20-26, 귀히 쓰는 그릇

[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부잣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 주인 밥상에 놓이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은 좋은 그릇일 것이다. 귀한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고 보관해 놓은 더 좋은 그릇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쓰레기통이나 오물통 등으로 쓰이는 그릇도 있을 것이다.

주의 종들이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말과 같은 불신앙적 이단사설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될 것이다.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 교리사상적으로 깨끗해야 한다. 모든 이단사설들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않고 바른 신앙 사상, 바른 교리 사상을 가져야 주님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주께서 귀히 쓰시는 종은 바른 말씀, 순수한 말씀을 소유한 종이다. 그런 종은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될 것이다.

[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주의 종들은 윤리적으로도 깨끗해야 한다. 젊은 교역자들은 무엇보다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 음란의 죄는 매우 치명적 죄악이기 때문이다. 정욕의 시험은 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남녀 관계에서 오는 시험은 가까이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책이다. 성경에서 요셉은 그것에 대한 좋은 예이다. 창세기 39:10, 12,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비록 집주인은 진실을 알지 못하고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범죄치 않으려 애쓴 경건한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와 그의 하는 일에 복을 주셨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는 말은 참 교회의 모습을 보인다. ‘깨끗한 마음은 모든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진실하게 믿는 마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모든 미움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며 자신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며 또 다른 이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는 자이다. 이런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이 모인 곳이 참된 교회이다.

참된 교회는 이런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여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의는 모든 죄와 불의와 악에 반대되는 말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의는 성경적 행위이다. 그것은 세상 표준이나 세상 사고방식에 따른 행위와 다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만을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모든 불신앙과 의심을 다 버리고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성경말씀을 통해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함으로써 견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13:34). 사랑은 모든 윤리적 선을 포함하는 가장 고상한 덕이며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성품이다. 천국에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다. 또 우리는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속에는 미움이나 교만이 없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해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려 해야 한다. 주의 이름을 순수하게 부르는 모든 종들과 성도들은 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특히 주께서 귀히 쓰는 그릇은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깨끗할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하고 온전해야 한다. 주께서는 이런 그릇들을 크게 들어 사용하실 것이다.

[23-24]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주의 종들이 소유해야 할 덕들이 있고 반대로 버려야 할 악들이 있다. 주의 종들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다툼이 나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란 용어나 명칭이나 표현상 문제로 다투는 말다툼이나 불경건한 변론들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일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주의 종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온유하고 다투지 않는 성품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이런 성품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성품이다. 지도자가 이런 성품이 없고 사사건건 사람들과 다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 모세는 매우 온유한 자이었다. 민수기 12:3에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주의 종들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는 자이어야 한다. 자녀 교육에서와 비슷하게, 영혼들을 양육하는 일에는 많은 고통과 눈물과 더불어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25-26]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 . . .

바울은 말한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주의 종들은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한다. ‘징계한다는 말은 교훈한다, 교정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주의 종들은 거역하는 자를 교훈하고 징계하되 온유함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혹시 회개함을 주셔서 진리를 알게 하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돌아오게 하신다면 그들도 회개하여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26절은 다시 번역하면,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던 저희로 깨어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실까 함이라”(원문, KJV, NASB, NIV). 우리는 다 과거에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었다. 에베소서 2:2,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거역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면 그들이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20절부터 2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깨끗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간직하고 오직 그 말씀만을 전파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해야 한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특히 다투지 말고 온유함으로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거역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들을 온유함으로 교훈하고 교정하고 징계해야 한다. 바른 사상, 바른 인격, 온유한 성품--이것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종들과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며 힘써야 할 목표이다.

[디모데전서 4장 강해설교말씀] 목사의 자기 훈련(딤전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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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4장에서는 목회자가 가져야 할 도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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