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다볼 산 하나님 말씀 중에서 다볼 산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볼 산은 고통에서 끊어짐을 당하게 만들어준 산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사탄의 고통에서 예수님 때문에 끊어졌습니다. 죄를 끊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볼 산을 통해서 구속사적으로 예수님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볼 산 הר תבור(하르 타보르)
♣명제: 다볼 산은 고통에서 끊어짐을 당하게 만들어준 산이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도 다볼 산에서 사탄의 세력에서 승리케 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에 사사기 시대를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우상에게 절을 할 때마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을 통하여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통곡하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방 민족들을 몰아내시게 되는 것입니다. 다볼 산은 사사 드보라와 바락이 연결되어 있는 산입니다. 사사 에훗이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왕의 군대장관은 시스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사 드보라를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드보라는 종려나무 밑에서 거주하면서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는 그때에 심판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삿4:4-5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하나님은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를 선택하셔서 가나안 왕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드보라’ דבורה(데보라 1683) 드보라, 꿀벌,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דבר(다바르 1696) 말씀하다, 선포하다, 공포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드보라의 이름 속에는 꿀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왕 야빈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신세입니다. 야빈 왕은 철 병거가 900대가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 전투력으로는 대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제무기도 제대로 없는 시대에 야빈 왕은 엄청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은 드보라를 선택하셨던 것은 고통스럽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꿀을 제공하는 벌과 같이 드보라를 통하여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콤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반드시 가나안 왕 야빈은 죽게 될 것이며 너희들은 하나님의 달콤한 말씀을 통하여 승리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을 드보라를 통하여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보라는 종려나무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드보라의 이름과 연관이 있습니다. 꿀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려나무의 열매를 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열매는 대추야자인데 이 열매를 말리면 엄청 꿀처럼 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열매를 꿀이라고 유대인들은 표현했습니다. 드보라는 종려나무 밑에서 재판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정하게 재판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꿀과 같이 소망이 없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왕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드보라는 꿀과 같은 말씀을 선포하는데 종려나무 밑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외부의 환경과 물질의 고통 때문에 힘들어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질병의 고통에 휩싸여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소망이 없는 자에게 드보라처럼 힘을 주시고 꿀과 같은 달콤한 십자가 진리의 복음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선택하여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를 쳐부수는 군대 장관으로 임명합니다.
삿4: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사사 드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락을 선택하여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왜 바락이라는 인물을 선택하고 있을까요?
‘바락’ ברק(바라크 1301) 바락,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ברק(바라크 1299) 빛을 보내다, 번쩍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바락이라는 단어는 번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락을 선택하신 이유는 이름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천둥 번개를 동반하여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쳐 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나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켜서 물리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셨고 번개를 쳐서 시스라 군대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다볼’ תבור(타보르 8396) 다볼,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תבר(테바르 8406) 깨뜨리다, 부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통하여 바락을 군대장관으로 세우고 다볼 산으로 가라고 하신 이유는 이곳에서 시스라의 군대를 완전하게 깨뜨려 부서지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미 철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최신식 전차가 900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무기들을 두려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이런 무기가 하나의 종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볼 산은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락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아 사명을 감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믿음을 가지고 다볼 산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비와 번개로 시스라 군대들을 모두 파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또한 다볼 산의 의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깨서 부셔버리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올라갈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믿고 올라가야 합니다. 육신의 두려운 시스라의 군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의지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락은 혼자 올라가지 못한다고 드보라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스라 군대들을 기손 강으로 이끌어내어 바락의 손에 넘겨준다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락은 두려워하여 드보라가 가지 않으면 못 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자의 고백입니다.
삿4:7-8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철저하게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시스라의 병거와 무리들을 기손 강으로 이끌어 내신다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왜 기손 강으로 이들을 이끌어 내신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기손’ קישון(키숀 7028) 기손,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קוש(코쉬 6983) 미끼를 놓다, 덫을 놓다, 올무로 잡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락에게 시스라 군대들과 철병거들을 기손 강으로 유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동물을 잡기 위해 덫에 미끼를 놓고 기다렸다가 잡는 것처럼 시스라의 군대들을 잡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손 강에 물이 많은데 시스라가 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리겠습니까? 시스라는 멍청한 장군이 아닙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기손 강을 왜 들어가겠습니까? 그런데 시스라는 두려움 없이 기손 강을 들어갔습니다.
삿4:13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 병거 구백 대와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을 하로셋학고임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시스라의 집이 있는 곳이 하로셋학고임입니다. 이곳부터 기손 강으로 군대들을 소집하고 있습니다. 시스라는 이스라엘 군대들을 쳐부술 생각에 들떠있습니다. 철 병거 900대라면 얼마든지 승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스라가 두려움 없이 기손 강으로 군대들을 소집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대 근동의 기후들을 보면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6개월은 건기가 되고 6개월은 우기가 됩니다. 그래서 4월부터 9월까지는 건기가 됩니다. 10월부터 3월까지는 우기의 기간이 됩니다. 건기 때에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습니다. 이때에 비가 내릴 확률은 극히 드물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근동의 전쟁을 보면 우기에는 전쟁을 하지 않고 건기 때에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철 병거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기에 전쟁을 하면 전차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전차가 없는 것이 더 용이하게 싸움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스라가 기손 강으로 철 병거와 군대들을 소집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기손 강은 우기가 아니라 건기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 기손 강에 물이 하나도 없고 바싹 말라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스라가 기손 강에 들어갔지 왜 들어가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이며 올무를 기손 강에 쳐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략에 시스라는 걸려들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바락을 선택하여 번개로 이들을 잡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건기이기 때문에 비가 올 확률은 없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번개와 비를 동반한 구름을 보내셨고 엄청난 양의 비를 쏟아부어 기손 강에 있는 시스라의 군대들을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삿4:14-15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이스라엘 군대들은 다볼 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비를 내리시고 천둥과 번개를 내리셨습니다. 건기에 비가 올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손 강에 덫을 놓고 시스라의 군대들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들의 전차는 물살에 휩쓸려가고 군인들도 정신 줄을 놓은 상태입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물이 쉽게 스며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금의 비만 와도 홍수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손 강은 금방 급물살로 변해버렸습니다. 시스라가 자랑하던 철 병거 900승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군인들은 모두 기손 강에 수장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개를 내리시고 비를 내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삿5:20-21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께 노래하는 부분 중에 있습니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웠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물이 없는데 어떻게 시스라의 군대들을 표류시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믿었던 전차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쪽지처럼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럼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하나님은 시스라의 군대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여있는 시스라의 군대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외형적인 것만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것을 내가 해결해 보려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미련한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그대로 멍청한 것처럼 따라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군대가 시스라 군대를 물리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용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시스라 문제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능하신 용사이신 우리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바락은 믿지를 못하고 드보라가 가지 않으면 자신도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삿4:8-9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바락이 드보라에게 말하면서 자신과 함께 가지 않으면 바락도 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드보라가 너와 함께 가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번 싸움에서 너는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께서 이름도 모르는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을 때에 믿음으로 가지 못하면 받을 상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락의 손을 통하여 시스라를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락이 두려워 가지 않는다고 하자 하나님은 상을 줄자를 바꾸시는 것입니다.
바락은 열심히 전투에 임했지만 그 공로는 여인에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어차피 할 거면서 입으로 하지 못하겠다고 믿음 없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할 거라면 믿음으로 예하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상을 준비해 놓으시고 영광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교회에서도 직분을 받았다면 예하고 한 번에 기쁘게 허락하여 직분을 감당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그에 따른 복을 주시고 영광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리 빼고 저리 빼고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하는 이런 직분이라면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다른 사람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럼 바락의 영광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헤벨의 아내 야엘입니다.
삿4:17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시스라는 기손 강에서 겨우 목숨만 건지고 나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망을 치다가 도착한 곳이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헤벨과 하솔 왕 야빈과는 서로 화평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야엘과 시스라도 일면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야엘’ יעל(야엘 3278) 야엘, 들 염소,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יעל(야알 3276) 이익을 주다, 도움을 주다, 소용이 있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야엘의 이름 속에 나오는 들 염소라는 뜻을 보면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시스라를 죽일 때에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 죽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락을 통하여 시스라가 죽고 상을 받기를 원하셨지만 바락은 이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엘을 통하여 그에게 이익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스라를 죽일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야엘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는 필요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존재가 되고 유용한 존재가 될 때에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고 하나님도 기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 생각해 보야할 것이 있습니다. 야엘의 집에 시스라가 들어왔을 때에 갑자기 야엘은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왜! 말뚝을 박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예언이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것도 남편과 잘 알고 지내는 외간 남자를 죽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확실하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단서를 보면 의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삿4: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시스가 바락의 군대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에 야엘의 장막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에 야엘이 시스라를 영접하면서 자신의 장막으로 들어오라고 말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시스라가 장막에 들어가고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었습니다.
‘들어오소서’ סור(수르 5493 동사, 칼, 명령, 남성, 2인칭, 단수, 연장형) 어기다, 미혹되다, 꺾어버리다, 라는 뜻입니다. 시스라가 다급하게 야엘의 장막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엘이 나가보았더니 시스라가 초췌해진 얼굴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현재 남편이 장막에 없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남편이 집에 없으면 외간 남자를 들이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손님을 대접하거나 영접할 때에는 남자들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시스라는 바락의 군대에 의하여 쫓기는 몸이기 때문에 너무나 상황이 다급하여 남편이 없어도 장막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명령법을 사용하여 이 장막에 들어와 몸을 숨기시고 때가 되매 떠나라는 의미로 들어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스라는 야엘의 장막에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야엘의 몸을 보면서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혹을 꺾지 못하고 야엘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시스라는 야엘에게 덮친 것입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이러한 표현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야엘이 이불을 덮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어의 언어 유희라는 것입니다. 또한 야엘이 들어오라고 했을 때에 시스라가 장막에 들어갔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원문에는 들어가는 것이 그녀에게 들어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אל(엘 413 전치사, 여성, 3인칭, 단수) ~에게, ~안으로, 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여성을 쓰고 있는 것은 야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시스라는 야엘에게로 들어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엘이 덮으니라’ כסה(카사 3680 와우계속, 동사, 피엘,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 남성, 3인칭, 단수) 덮다, 가리다, 위장하다, 부끄럽다, 라는 뜻입니다. 야엘이 이불을 가지고 시스라를 덮었다는 의미는 성적인 폭행을 미화시킨 장면입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을 가리고 덮어서 추하지 않게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시스라가 성적인 폭행을 했다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야엘은 현재 장막에 혼자 있습니다. 그리고 야엘은 이불을 덮어주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덮었습니다. 피엘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여자로서의 수치를 더 이상 보이지 말라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덮어준 것은 야엘입니다. 하지만 남성형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스라의 힘에 의하여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시스라는 군대장관입니다. 전투에 능한 장수이며 남자입니다. 얼마든지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결국 야엘은 자신의 수치를 덮기 위하여 이렇게 시스라를 덮어주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렘3:25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하고 있는 곳을 보면 수치를 덮는다는 곳에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치욕과 수치를 당한 것이 덮어진다는 것을 표현할 때에도 כסה(카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호2:9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벌거벗은 ‘몸을 가릴’이라는 단어도 כסה(카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있을 때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하체를 덮어주었습니다. 이 단어도 כסה(카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을 보았을 때에 시스라의 힘에 의하여 야엘은 성적인 폭행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스라를 편안하게 잠을 재우고 나서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게 되는 것입니다.
삿4:21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야엘은 시스라가 물을 달라고 했지만 우유를 주므로 안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야엘은 그다음에 장막 말뚝을 가지고 시스라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깊이 잠드니’ רדם(라담 7290 동사, 닢알, 분사수동) 깊이 잠들다, 정신을 잃다, 기절하다, 라는 뜻입니다. 시스라는 마음의 안정을 갖고 깊은 잠에 들게 됩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밖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자신은 현재 쫓기는 몸입니다. 깊은 잠에 빠질 처지가 아닙니다.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시스라는 야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야엘을 믿었다는 것은 야엘이 시스라를 안정시키고 깊은 잠에 빠지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닢알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 스스로는 깊은 잠에 빠질 수 없지만 야엘이 최대한 안정을 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사수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유를 주고 심신을 안정시킨 후에 시스라를 죽이기로 야엘은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관자놀이’ רקה(라카 7541 전치사, 명사, 여성, 단수, 남성, 3인칭, 단수) 관자놀이,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רקק(라카크 7556) 침을 뱉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야엘이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말뚝으로 박아서 죽였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야엘이 갑자기 살인자로 돌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남편과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자신의 집에 들어왔다고 함부로 죽일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시스라의 성적인 폭행을 통하여 야엘은 시스라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관자놀이에서의 뜻을 보면 침을 뱉었습니다. 이것은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고 정당방위였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삿5: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며 장막에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입니다. 만약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였는데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면 하나님은 살인자들도 복을 주신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도 사람을 죽여 놓고 복을 받을 수 있냐고 믿지 않는 자들은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불가항력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볼 산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볼 산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싸워주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미리 끝내 놓으시고 믿음대로 나갈 수 있도록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바락처럼 믿음이 없어서 흔들린다면 자신에게 받을 상급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상급을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맡겨주신다는 것은 축복의 길을 열어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거절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먼저 기회를 주셨겠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나중에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다면 감사하면서 그대로 받으면 됩니다. 이리저리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축복은 바로 눈앞에 왔을 때에 잡아야 합니다. 내 뒤로 넘어가면 잡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기회는 머리카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할 거야!라고 말하지만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이 기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볼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시고 시스라의 군대와 같은 문제들을 쳐부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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