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10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자기 의를 세우는 율법주의 신앙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열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열심히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얻는다고 해도 자신의 의로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아야지 삯으로 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의를 세우는 율법주의 신앙(롬 10:1-3)
1절 아델포이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카이 헤 데에시스 헤 프로스 톤 데온 휘페르 투 이스라엘 에스틴 에이스 소테리안
롬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10:1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이다. 여기 쓰인 '멘'('한편')은 주로 '데'('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의 '에메스'('나의')는 '무'('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는 단순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엡 6:18). 따라서 본문에 쓰인 '내'(에메스) '원하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잘 되기를 바라는 소원(1절)이다. 이들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곧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멸망과 파괴로부터 구원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머리 위로 넘실거리는 영원한 진로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말은 그들이 확신을 받으면 돌아설 수도 있다는 듯을 내포한다. 이들이 불신앙 가운데 구원받기를 믿음으로 기도할 그는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비록 이들에게 불리한 것을 전파해 왔지만 그는 아직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바라시는(벧후 3:9), 곧 죄인들이 죽는 걸 바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같이 자비롭다. 우리 자신이 구원이 해결되었으면 마음으로 타인의 영혼의 구원을 진심으로 소원하며 기원하려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이것을 그는 자신의 "마음에 원하는 바와……구하는 바"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의 소원의 강도와 진실성. 그것은 "그의 마음의 원하는 바"였다. 입술로만 번지르하게 떠들어대는 형식적인 얘기가 아니라 진정한 소원이었다. 이것이 그의 기도 이전에 오는 점을 유의하자. 기도의 정수는 마음의 소원이다. 시큰둥한 소원에는 거절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온갖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하나님께 이 소원을 올리는 일. 그것은 자기 마음의 소원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기도였다. 마음에 소원이 있을지라도 이것이 하나님께 제출되지 않으면 기도가 될 수 없다. 바라고 소원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기도가 아니다.
2절 마르튀로 가르 아우토이스 호티 젤론 데우 에쿠신 알르 우 카트 에피그노신
롬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10:2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는 공적(公的)인 책임감과 엄숙함을 내포한 단어이다(Cranfield).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열심을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엄숙히 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하나님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이나 '하나님에 대한'으로 해석해야 한다. '열심'을 표현하는 헬라어 '젤론'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전', '율법'에 대해 충성하는 그런 열심을 나타낸다(왕상 19:10, 14; 왕하 10:16; 시 69:9).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성전, 율법들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 바울 역시 유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으로(갈 1:14)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성이었으므로(행 26:5) 이스라엘의 열심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으며 동정하는 마음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는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심이 비난받은 이유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는 '지식'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헬라어 '그노시스'보다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하나님이 실제(實在)하는 것 이상은 몰랐다. 즉 그들은 구원을 주는 지식(1:17)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결여된 그들은 보아도 참으로 알지 못했으며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막 4:12).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고집은 오히려 우매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 즉 구원을 주는 지식에 의해서 수반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3절 아그노운테스 가르 텐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 카이 텐 이디안 디카이오쉬넨 제툰테스 스테사이 테 디카이오쉬네 투 데우 우크 휘페타게산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0:3
바른 지식이 없는 유대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였다. 원인을 이끄는 문장 서두의 '가르'('왜냐하면')는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 2절 후반부의 설명을 이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 '하나님의 의'(투 데우 디카이오쉬넨)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이뤄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신약에서 나오는 '의'(Righteousness)는 주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계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에 인간을 참여케 하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를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인간들을 '의롭다'하시기로 계약을 수립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를 믿음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르고'(아그노운테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므로 기인된 '오해'를 의미한다(Meyer).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는 '세우다', '정하다', '확증하다'의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의'에 맞서 '자신의 의'를 세워 불순종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계속 애써 온 것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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