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원문 성경강해

[고린도전서 14장 헬라어 강해] 방언에 대한 예언의 유익성(고전 14:1-6)

기혼샘 2021. 5. 2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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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린도전서 14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방언에 대한 예언의 유익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는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고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은사를 받는 것도 좋습니다. 믿음 생활에 활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은사는 선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의도적으로 받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사주의에 치우치는 것도 잘못이지만 성령의 은사를 터부시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과 영적인 은사를 잘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은사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복음 말씀을 무시합니다. 은사만 있으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또한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방언과 예언의 유익성에 대해서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잘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방언에 대한 예언의 유익성(고전 14:1-6)

 

1절 디오케테 텐 아가펜 젤루테 데 타 프뉴마티카 말론 데 히나 프로페튜에테

고전 14: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바울은 사랑이 제일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13:13). 그러므로 모든 다른 은사들도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 있는 것뿐이니, 은사를 구하는 자는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사랑을 실시함에 더욱 필요한 은사를 구해야 된다.

"구하라"는 말은 붙잡기 위하여 열심히 좇아 감을 의미한다. 랑을 실행하려고 전심(專心)함이, , 그 의미이다(Lenski). "예언하려고 하라"함은, 곧 남들을 영적(靈的)으로 유익하게 지도하는데 필요한 성령의 지시하는 말씀을 구하라는 뜻이다. 이 은사는, 더욱 사랑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이 아래 자세히 진술된다. 사랑을 따라 추구하고 사모하라고 했는데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다. 반드시 그것을 구해야 함을 말한다.

2절 호 가르 랄론 글롯세 우크 안드로포이스 랄레이 알라 토 데오 우데이스 가르 아쿠에이 프뉴마티 데 랄레이 뮈스테리아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한다는 말씀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 방언(方言)이 세상의 어떤 외국말이라 하고, 그것을 말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 외에는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그 말을 배운 자가 그 말하는 자리에 한 사람도 없는 경우). 그러나 이 해석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 구절 하반에 있는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말씀을 보니, 그것이 영적 방언이고 외국어를 가리킴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적이 교회 시대에도 있을까? 교회 시대란 것은, 계시시대(啓示時代), 곧, 사도 시대와 구분된 명칭이다. 사도 시대에는, 표준적인 이적과 계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이렇게 터를 닦는 의미의 기본적인 역사(役事)를 하셨다. 그 시대에 있었던 이적과 계시는, 실상 주님 재림 때까지 장성할 교회의 뿌리와 터전을 이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사도의 역사(役事)를 가리켜 터 닦는 일로 비유하였다. 고전 3:10에 말하기를, 교회의 "터를 닦아두었다"하였, 11절에 말하기를,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라고 하였다. 이 말씀 뜻은, 사도가 그리스도를 전파할 계시와 능력을 받아 복음을 나타낸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이 터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2:20; 21:14).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도적 역사는, 나무에 있어서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는 한 번만 일정한 자리에 잡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돋아 나온 줄기가 질적으로는 뿌리와 같은 것이지만, 그 모습에 있어서는 뿌리와 다른 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그 능력도 여전하시지만, 그의 사역의 경륜은, 사도 시대에는 그렇게 나타내셨고, 교회 시대에는 이렇게 나타내신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에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여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다음에는 만나 내리시기를 그치셨다.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시대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에, 이는 마치 뿌리에서 돋아난 나무와 같으니, 그 자라나는 도중에 다시금 뿌리의 형태로 자체를 거듭 나타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교회는 그 뿌리를 의미하는 사도적 역사를 거듭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기억할 것은, 교회 시대에는 사도의 증표를 보여주는 이적은 없다 할지라도 특별 섭리는 있다는 것이다(L.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68).

특별 섭리란 것이 계시사(啓示史)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하나님의 특수 간섭이기 때문에 그의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면,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과 사도의 행한 이적과는 다르다. 가령, 병 고침 받는 실례를 들어 말하면, (1) 예수님과 사도의 이적은, 취급된 병자가 모두 치료되었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神癒)라는 것은 그렇지 못하고,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되는 자도 있거니와 치료되지 않는 자도 있다.

(2) 그뿐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의 이적으로 고침 받은 병은 재발하는 법이 없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 병이 재발되는 경우도 있다. (3) 예수님과 사도들의 고친 병자들의 몸은 당장 완전해졌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렇지 못하다.

위의 세 가지 사실은, 교회 시대의 신유의 특징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들이 있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시대에 이르러서 약해지셨다는 것이 아니다. 나님의 권능은 여전히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 사역 경륜의 이와 같은 차이점은, 특별히 교회의 터가 되는 계시 시대(예수님과 사도 시대)의 표준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우리 신앙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및 사도적 전도 내용(성경)을 표준으로 하고, 거기서 안식해야 되는 것이다. 만일 교회 시대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혹은 사도들과 같이 표준적인 이적을 행한다면, 그들도 역시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 있는 계시(啓示)도 받는 다고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과 성경만 기초로 한 기독교의 성격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의 방언을, 사도들의 역사로 나타났던 그 시대의 방언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방언 운동에는 많은 그릇된 방언들도 드러난다. 이런 방언들은 물론 금지해야 된다. 다만 방언을 함이 자기에게 유익한 줄 아는 이는, 고전 14장의 교훈을 지켜야 될 줄 생각한다.

3절 호 데 프로페튜온 안드로포이스 랄레이 오이코도멘 카이 파라클레신 카이 파라뮈디안 

고전 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 사도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어떤 특별한 사건을 예고하였(11:28, 21:11). 그러나 그들(혹은 그들 중 어떤 이들)도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위한 계시 역사를 하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진리를 해명하기도 하였다(12:6). 그들의 역사도 사도들의 역사와 함께 신약 교회의 기초를 이루었다(2:20; 12:28).

이점이 방언하는 자와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교회의 기초가 아니고, 은사의 미말(尾末)에 속한다(고전 12:10,28). 그러나 예언 역사는 사도의 역사처럼 계시 시대(사도 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직(單回職)에 속한다. 교회 시대에는, 예언의 후신(後身)으로서 설교가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양자(兩者)의 기능이 같기 때문이다. 예언이 건덕, 권면, 안위를 그 기능으로 한 것처럼(고전 14;3), 설교도 그러하다.

다만 예언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초자연적으로 그에게 찾아왔으나, 설교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나아가야 한. , 설교자는, 말씀의 청지기란 말이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다(고전 4:1,2; 딛 1:7). 다시 말하면, 설교자는 기독교의 터를 닦는 자가 아니고, 사도와 선지자가 닦아 놓은 터(고전 3:10-11) ,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설명(성경)을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는 자이다.

설교자는, (1) 맡기 운 터와 자재(資材) , 성경을 그대로 보수할 책임이 있고, (2) 또한 그 터와 그 자재를 가지고 집 지을(교회 세울) 책임도 있다. 그가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그는, 말씀을 전파할 때에 자기의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 전부를 전할 책임이 있다.

현대 교회에도 예언이 있다는 이들이 있다. 만일 예언 같은 것이 오늘날도 나타난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될 것인가? (1) 그 예언이 맞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배척하기 쉬운 일이다. 그러나 (2) 그 예언이 사실과 부합할 때에는 우리로서 그것을 거부하기가 곤란할 듯하다. 그 이유는, 그 예언이 맞아도 그것이 거짓된 예언일 수 있으니(13:2), 하나님의 명령대로(요일 4:1) 착실히 영들을 시험하며 지내보아야 된다.

그것을 시험하며 지내보는데 오랜 세우러이 지날 수도 있다. 신자가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영들을 시험하는 것이 오히려 경건한 행동이다. 13:1-3에 말하기,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라고 하였다.

사단이 사자도 복음을 높이는 체하며(16:16-17), 또한 도덕이 있게 사람을 대할 수도 있다(고후 11:14-15; 7:15). 그러므로 우리가 현대의 "예언"이란 것을 시험해 봄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현대의 예언보다 성경이 권위 있으며,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15:4).

"덕을 세움""세워 나감"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신자들의 신앙 사상을 증진 시킴이다. "권면"은 경계하여 양심과 의지로 옳은 데로 움직이게 함이고, "안위"는 난관과 핍박을 당한 신자들에게 소망을 보여 주어 그들의 정서(情緖)로 하여금 기쁨과 용기를 취하도록 하여 줌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예언"은 하필 성령의 특종 예고(特種豫告)를 전달함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광범위의 영적 교훈과 지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4절 호 랄론 글롯세 헤아우톤 오이코도메이 호 데 프로페튜온 에클레시안 오이코도메이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 방언하는 자의 말은 남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인 만큼, 듣는 자들에게는 유익이 없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영적(靈的) 깨달음을 줄 뿐이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온 교회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여 유익을 받도록 한다.

5절 델로 데 판타스 휘마스 랄레인 글롯사이스 말론 데 히나 프로페튜에테 메이존 가르 호 프로페튜온 에 호 랄론 글롯사이스 에크토스 에이 메 디에르메뉴에 히나 에 에클레시아 오이코도멘 라베

고전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 바울의 논조는 그때의 방언 은사를 전연 불필요하다고 함이 아니고, 다만 그것에 대한 과대평가(過大評價)를 막는 것뿐이다. 방언은 통역되지 않으면 남들에게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한다. 방언은 벌써 위에 해석한 바와 같이(2), 영감(靈感)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감과 동반(同伴)되지 않는 순간부터는 효능을 잃는다고 생각된다. 러므로 통역하는 자도 영감 중에서 하여야 된다(Hodge). 방언하는 자 자신이 통역의 은사까지 겸한 자가 있으나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언의 효능에 대하여는 위의 3에 기록되었다.

6절 뉘니 데 아델포이 에안 엘도 프로스 휘마스 글롯사이스 랄론 티 휘마스 오펠레소 에안 메 휘민 랄레소 에 엔 아포칼륍세이 헤 엔 그노세이 에 엔 프로페테이아 에 엔 디다케 

고전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14:6

바울은 자기로서 방언하는 것으로는 남들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고 단언하여, 앞서 말한 논조를 강화시킨다. 이 점에 있어서 그가 남들을 실례(實例)로 드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실례로 들어 말한 것은, 그의 겸손이 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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