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외식하는 자여 비판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주님이 말씀합니다. 우리도 나 자신의 문제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면서도 남의 작은 잘못에는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어합니다. 이제 우리는 남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부터 올바르게 깨닫고 고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목: 외식하는 자여 비판하지 말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마태 7:1-6
요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 7:1)
주제: 비판과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형제자매를 이해하고 위해 기도하자
오늘은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본래 맥추절은 보리와 밀의 추수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맥추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신 16:10-11)
오순절(Pentecost)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한 명칭이라면, 맥추절(Harvest of Barley & Wheat)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한 가나안 농경문화와 관련한 명칭입니다. 오순절이 계절적으로는 보리수확과 같은 때이기 때문에 보리 수확을 뜻하는 맥추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룻기에 보면,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유대 남자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은 후에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마침 맥추절(보리 수확) 계절이어서 시어머니를 위해 보리밭에 나가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함으로 가까운 친족 엘리멜렉의 잃어버린 땅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고, 이들이 후에 다윗왕의 조상이 되었으며(증조), 예수님의 족보(마 1장)에까지 기록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룻기는 오순절 절기에 읽는 성경인데, 룻기의 배경이 보리 수확 때인 맥추절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강림주일로 지켰습니다. 이날이 성경적으로 칠칠절이며 오순절입니다. 한국교회는 부지런하여 한해의 상반기를 마치고 하반기가 시작되는 7월 첫 번째 주일에 감사 주일로 지킵니다. 11월에는 추수감사 주일로 쌀 농산을 감사하며 지냅니다. 이모작을 하는 한국에서는 한 해의 전반기에는 보리 수확을 하고, 후반기에는 쌀 수확을 합니다. 맥추절은 말 그대로 “보리를 수확하는 날”입니다. 맥추감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난 반년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앞으로 남은 반년 동안도 감사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요즘은 농경사회가 아니고 산업시대인데, 직장이나 사업을 중간 점검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주일로 지킵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Be careful for nothing; but in every 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unto God. "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And the peace of God, which passeth all understanding, shall keep your hearts and minds through Christ Jesus.” (빌 4:6-7)
산상수훈을 계속 강해를 합니다. 오늘은 7장을 시작합니다. 첫 부분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가르치십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는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 모두는 각자 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분야든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또 자라온 환경과 여건이 모두 다르기에 어떤 것이 나와 같지 않다고 쉽게 비판을 한다거나 남을 자로 재듯이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판단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전 4:3-5에 보니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기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라고 하십니다.
학문세계에서는 남의 연구에 대해 크리틱(critique)을 해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발표된 논문이나 저술에 대해 평가를 합니다(Book Review). 모두 완전하지 못하기에 서로 문제점을 보완하여 더 완벽한 연구를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비평을 위한 비평은 아무 쓸데없습니다. 또 친하고 좋아하는 친구의 문제점이나 고쳐야 할 점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비평이라기보다는 충고입니다. 나와 아무 관계없는 친구의 허물을 말하기를 좋아하면 이것은 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에 바리새인, 서기관들, 사두개인, 제사장들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비판을 수용하시고 더 좋은 교훈으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님으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18 예수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동전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님께 와서 물어 여쭈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예수님의 변증법은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상식을 뛰어넘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이 재판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늘 판단을 해 주어야 하는데 많은 경우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판사들은 스트레스가 많답니다. 이스라엘 12지판 중 단(Dan) 지파는 이름 자체가 ‘심판하다’는 말로 심판자 하나님의 자리에서 자기 백성들을 심판합니다. 야곱이 임종기도에서 다섯 번째 아들이 저지를 악행을 예고하면서 심히 마음 아파했습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단 지파는 이스라엘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인본주의를 계속 조장하여 하나님을 정면 대적하고 제가 심판주 노릇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Dani-El)은 좋은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심판주(Dani)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단 지파처럼 되지 말고, 다니엘처럼 모든 재판권, 판단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적인 삶이 우리에게는 은혜가 되고 축복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위로하며 한 말을 기억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형들이 이제 동생이 보복하지 않나 염려하고 있을 때, 요셉이 그들이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창 50:19-21) 하였습니다. 즉 요셉은 하나님만이 심판자시오 궁극적인 판단자이심을 강조했습니다. 요셉과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시기에 그 자리를 넘보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인 판단자는 하나님이시니 판단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주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내 눈 속에 들보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또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기 위해 선한 척 합니다. 정직한 척합니다. 깨끗한 척해야 합니다. 하는 척해야 기분이 좋습니다. 불행한 인간입니다. 도리어 상대방의 눈에 있는 티가 크게 보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대안을 내어 놓으셨는데 먼저 우리 눈 속에 들보를 빼어 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사랑의 손길로 말없이 빼어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모습입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언제나 자신의 들보를 빼내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십시다. 내 자존심, 내 강한 자아, 교만, 편견, 미움, 고집 등의 들보를 과감하게 빼내어버립시다. 대신 이웃의 약점을 가려주고 아픈 부분을 감싸주고 이웃의 눈에 있는 티를 사랑의 손길로 모르게 빼내어 주는 사랑의 사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들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매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음을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판단에 맡깁시다. 로마서 14장에 보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절)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2-3절)고 합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자는 우습다는 것입니다. 제 주인이 있는데 그 하인은 주인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것입니다. 이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면 되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면 됩니다. 다만 감사함으로 먹을 것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면 됩니다. 우리는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형제를 판단하며 업신여기는 자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롬 14:11절에 보니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 합니다. 남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13절 말씀에 보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서로 비판하지 맙시다. 비판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 관계를 맺을 때 조심할 것은 "비판하지 말라(1절)"라고 말씀합니다. '정말로 겸손한 사람은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도 비판할 용기가 없습니다. 왜요? 내가 더 큰 죄인이니까요. 하물며 누구를 향해서 이러고저러고 말하겠습니까? 아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은 부득불 이웃에게 언제나 겸손으로, 사랑으로, 관용으로,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의견은 다 같지 않습니다. 내 의견이 중요하듯 상대방의 의견도 중요합니다. 나와 상대방의 의견, 생각, 사고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얼굴이 다르듯이 생각도 다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는 것, diversity, 그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어떤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거든요. 얼마든지 나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흑백 논리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총천연색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검정색과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빨간 색도 있고 노란 색도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고기를 먹는 사람과 못 먹는 사람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고기라는 것은 우상의 제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 같이 신앙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 중에는 우상 섬기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우상 섬기는 사람들이 우상을 섬긴다면 제물을 갖다 바치지만 그것을 신(神)이 먹습니까? 괜히 갖다 놓은 것이지요. 조상한테 제사드린다고 하지만 먹기는 누가 먹습니까? 그와 같이, 옛날에도 신께 제사드린다고 고기를 바쳐놓고는 그것을 자기들이 먹었어요. 또 다 먹을 수 없으니까 그것을 가져다 팔아요. 시장에서 파는 고기의 태반이 우상의 제물이었어요. 그러니까 처음 믿는 사람은 '우상의 제물 먹는 것은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니까 안된다'해서 그 고기를 안 먹었어요. 어떤 사람은 '별걸 다 따지네. 고기는 그냥 고기지. 거기에 귀신 이빨 자국이 있나, 뭐 침이 묻었나, 아무것도 아닌데'해서는 마음대로 다 먹었어요. 그래, 고기를 먹는 사람은 못 먹는 사람보고 '저 사람이 아직 믿음이 약하구만'하고 비웃었고, 또 못 먹는 사람은 먹는 사람보고 '저 사람은 아주 잡식 체질이라서 아무것이나 막 먹는구만. 도대체가 변변치 못해. 신앙이 잘못됐어'하고 비판했어요. 바로 이 사이에서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3절)"-먹는 자는 못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고, 또 못 먹는 자는 먹는 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라 함입니다.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를 비판하고자 할 때, 정면으로 비판하지 말라. 그것은 남에게 창피를 주는 일이다. 비판받는 사람은 비판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의 낮아짐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더없이 아프게 한다. 그런고로 정면으로 비판하는 일은 좋지 않다. 또 안보는 데서, 뒤에서 비판하는 것은 더 나쁘다. 이것은 불성실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자 톨스토이는 이런 재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모른 척해라. 더 중요한 것은, 아예 보지 않는 것이다. 허물이 될 이야기는 듣지도 말고, 비판해야 될 이야기는 기억하지도 말아라. 그것이 더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하라. 그것으로 부족한 점을 다 소화해버리라. 이것이 제일 아름다운 일이다.' 가끔 우리는 남을 비판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다 해보았듯이 그래도 해결되는 일은 없어요. 내 마음 상하고 남의 마음 상하고, 이렇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그들이 하나님을 욕하고 원망한다고 해서 모세가 그들 앞에 '패역한 너희들아'하고 책망을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크게 책망하십니다. '너는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자 아니했고 너는 나를 거역했다' -왜 이러느냐, 내 백성을 비판하든 말든 그것은 내가 할 것이다, 패역했느니 어떠니, 그것은 네가 할 말이 아니다, 내 백성이 패역한 것은 내가 책망하느니라, 네가 누군데 내 백성을 비판하고 있느냐 하심입니다. 그야말로 무서운 책망이에요. 그런가 하면 모세가 실수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판했어요. 하나님의 종이 어쩌자고 이방 여자를 소실로 삼았느냐 하며 비판했어요.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치셨습니까? 바로 미리암이었습니다. 내 사람 모세를 칠 것이 내가 치느니라, 감히 네가 왜 입방아를 찧느냐, 네가 지금 어 디에 대고 비판을 하느냐 하셨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을 누가 비판한다는 말입니까? 잘 믿느니 못 믿느냐, 되느니 안 되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His part, our part-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어요.
내가 할 일은 받아들이는 것이요, 영접하는 것이요, 이해하는 것이요, 참는 것이요, 믿어주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자기 마음에 확증할지니라 (5절)"--자기 소신대로 하라 함입니다. 자기 마음에 확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5절)"---어떤 사람은 이런 날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저런 날을 주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판단과 비판은 하나님의 몫임을 기억하고 날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심정으로 자신을 더 돌아보고 남의 약점과 부족한 점을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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