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구약설교말씀

[모리아 산 하나님 말씀] 모리아 산 הר מוריה(하르 모리야)

기혼샘 2020. 11. 2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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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모리아 산 하나님 말씀 중에서 모리아 산이라는 강해설교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던 산입니다. 이 산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시험을 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이삭을 바친 것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들을 드릴 때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해 놓으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리아 산 הר מוריה(하르 모리야)

 

명제: 모리아 산은 시험을 받은 산이며 믿음으로 승리한 산이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시험이 있으며 믿음으로 승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 간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도 초조함이 분명히 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오기 전에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현재 자신의 상황을 보면 자녀를 낳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사라가 애굽에서 데려온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보내어 아이를 낳으려고 합니다.

창16:1-2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고대근동 지역에서는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다른 여인을 통하여 아이를 낳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니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통하여 아이를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갈’ הגר(하가르 1904) 하갈,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도망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갈이 아이를 낳았을 때에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하갈은 구원받지 못한 백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갈은 이름 속에 있는 뜻처럼 임신을 한 것을 알고 사라를 멸시하다가 쫓겨나서 도망자의 신세를 겪게 됩니다. 결국 하갈은 율법에 속한 자들을 상징하는 여인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갈4: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부터 나온 율법에 속한 자라는 것을 말씀하며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다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라가 아브람에게 하갈을 취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하니 아브람은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창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사라가 아브람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하갈을 통하여 자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브람은 사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래를 통하여 주실 언약의 자녀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창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하고 하갈이 임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갈이 임신함을 깨닫고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침하였더니’ בוא(보 935 와우계속, 동사, 칼형,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들어가다, 동침하다, 받아들이다, 허락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씨에서 나온다고 했기 때문에 하갈의 몸에서 나와도 자신의 자손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갈과 즉시로 동침하기 위하여 하갈의 침실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도 하지 않고 즉시 들어가 하갈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으로서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초조할 수가 있습니다. 환경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없고 풀어지는 것 같지도 않을 때에 아브람과 같은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창16:15-16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성경은 기록하기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스마엘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가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여기에 아브람의 나이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섭섭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의 나이 99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에게 들어가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타나서’ ראה(라아 7200 와우계속, 동사, 닢알형,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감찰하다, 발견하다, 주목하다, 깨닫다, 나타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아브람은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고 아브람은 그 아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아브람을 하나님은 지켜보면서 감찰하시고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람은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즉시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언약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닢알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나주실 때에 만날 수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행하여’ הלך(할라크 1980 동사, 히트파엘형, 명령, 남성, 2인칭, 단수) 동행하다, 따라가다, 섬기다, 걸어가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13년 만에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걸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것을 볼 때에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13년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명령법을 사용하여 나와 함께 동행하여 내가 허락한 언약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너에게 임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하라’ תמים(타밈 8549) 정결한, 흠 없는, 온전한, 이라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며 흠 없는 존재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브람이 이와 같이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13년의 인생은 온전한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약속하신 말씀들이 있는데 이것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자손인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시고 아내의 이름은 사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며 깨끗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할례의 언약을 통하여 이와 같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례의 은혜를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창21: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하나님의 마음은 한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속의 자손이 아닌 율법의 자손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대로 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13년 만인 99세에 나타나셔서 언약의 자손인 이삭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99세를 기점으로 율법의 사람이 아닌 언약의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갈의 자손들은 율법의 자손들로서 심판받을 인생이지만 사라의 자손들은 언약의 자손들로서 구원의 은혜를 받고 천국의 기업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갈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과 같은 자녀는 율법의 자녀로서 심판받을 백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나온 약속의 자녀인지 아니면 이스마엘과 같은 율법의 자녀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은 백성이라면 나는 확실히 이삭과 같은 언약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삭이 탄생했을 때와 이스마엘이 탄생했을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에’ ילד(얄라드 3205 동사, 닢알형, 부정사연계형) 낳다, 해산하다, 출생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 아들은 약속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사라가 낳을 수 없는 중에 이삭을 낳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낳은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뜻대로 낳은 아들입니다. 이렇게 이삭이 출생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닢알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낳게 된 것입니다. 내 힘으로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아들을 주시지 않으면 절대 낳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약속의 자녀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는 문법이 ילד(얄라드 와우계속, 동사, 칼,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자손들은 능동으로 낳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하심이 아닌 인간의 의지로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이스마엘과 같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백성들은 자신의 의지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노력한다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주셔야 만이 가능한 것이 구원입니다. 나의 구원은 내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나왔다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 이삭을 낳고 시간이 흘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궁금했습니다. 100세에 준 이삭을 더 사랑하는지 아니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이삭을 모리아의 산에다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삭이 장성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험하시려고’ נסה(나사 5254 동사, 피엘,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시험하다, 시험 삼아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창세기 12장에서 언약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에게 들어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는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실수 때문에 항상 아브라함의 마음 한 구석에는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자책감이 아브라함의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런 마음을 아시고 시험을 통과시켜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데 이 시험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모든 자책감과 지금까지 잘못했던 것들을 이 시험 한 번으로 모두 씻겨주시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강조능동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은 피할 수도 없는 시험이며 하나님이 작정하고 아브라함에게 시험하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섭함도 완벽하게 씻겨내시겠다는 다짐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창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은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일러 준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의 섭섭함을 모두 씻어내시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왜 모리아의 산으로 가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모리아의 지형적인 뜻을 통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모리아’ מוריה(모리야 4179) 모리아,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ראה(라아 7200) 보다, 택하다, 경외하다, 대면하다, 라는 뜻과 היה(하야 1961) 임하다, 계시다, 섬기다, 라는 뜻이 합성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리아의 산은 하나님께서 감찰하여 보시는 장소이며 아브라함의 신앙을 계속적으로 감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섬김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산입니다.

 

그래서 모리아 산은 시험을 받는 산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리아 산에서 시험을 받는 것처럼 신앙생활 속에서 시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를 드리라’ עלה(알라 5927 동사, 히필, 명령, 남성, 2인칭, 단수) 치료받다, 상달하다, 고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독생자인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아브라함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죄책감을 치료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상한 마음을 고쳐주시고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의도입니다.

 

여기에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은 빠지고 아브라함 스스로 이 시험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히필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을 이번 하나님의 시험을 통하여 확실하게 마음의 부담을 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시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념으로 이 시험을 통과해 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리아의 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라가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 시험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있는 불순종을 해결해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라 때문에 결국 아브라함은 불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이야기를 했다면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제사에 쓸 나무를 준비하여 모리아의 산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일어나’ שכם(샤캄 7925 와우계속, 동사, 히필,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아침 일찍 일어나다, 속히 행하다, 진지하게 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죄책감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절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어기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동안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아브라함은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것도 내가 죄를 지은 것 때문에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을 순종으로 만회할 기회를 하나님의 주신 것입니다.

 

히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받을 때에 기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기뻐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드렸으니’ προσφερω(프로스페로 4374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 단수, 3인칭) 드리다, 데려오다, 섬기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지 않고 즉시 하나님께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의 산으로 가서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순종했던 자신의 삶을 회개하는 마음에서 이삭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이제부터 순종의 삶을 살겠다고 하는 다짐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이삭을 바친 것이 실제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건이 확실하다는 것을 직설법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삭을 드린 것은 하나의 오차도 없이 행동과 마음이 일치하여 온전하게 드렸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동은 이미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고 나서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이삭을 바칠 때에는 아브라함의 의지로 드렸다는 것을 능동태를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이삭을 바쳤더니 하나님은 도로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모리아의 산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마음은 홀가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기쁜 마음으로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창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의 어귀에 다다랐을 때에 종들을 남겨놓고 자신과 이삭만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종들에게 말하기를 예배를 드리고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리라’ שוב(슈브 7725 동사, 칼, 미완료, 공성, 1인칭, 복수, 연장형) 돌아오다, 회복하다, 데려오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의 어귀에서 자신의 종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아들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올라갔다고 함께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예배를 드린다는 것과 돌아온다는 것이 복수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죽이려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실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종들에게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확실히 이삭과 함께 내려오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연장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직접 권면하여 말할 때에 사용하는 문법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은 통과했습니다. 전에는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과 동침하여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이제는 사라와 합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삭과 함께 즉시로 생각하지도 않고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하여 순종하였습니다. 이것 자체로 하나님의 시험은 통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리아의 산에서 번제에 드릴 숫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창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모두 통과하고 나서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숫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뿔이 수풀에 걸려 도망을 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산에 숫양이 있을 수가 없는데 숫양이 있었습니다. 번제에 쓸 양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숫양’ איל(아일 352) 숫양,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ול(울 193) 권세 있는 자, 지도자,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양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바로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생명의 권세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면 어떠한 자들도 죽음에서 살아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창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대신하여 숫양을 번제로 드리고 이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이름이 지금까지 불러지는데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모리아의 산에서 무엇이 준비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성전을 준비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를 원하셨고 아브라함이 독생자 이삭을 드림과 같이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은 신약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 주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며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장소에 정확하게 솔로몬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요19:17-18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 문 밖의 골고다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쳤듯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살릴 것을 믿음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으신 채로 놔두지 아니하시고 무덤에서 삼일 만에 부활시키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준비하시고 예언하신 대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고 선택한 나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모리아 산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모리아의 산은 시험받는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불순종했던 삶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이런 죄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시험하시고 이 시험을 통과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책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씻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모리아의 산은 승리의 산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통하여 승리하고 축복을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모리아의 산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승리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통과하고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번성하는 복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의 역사가 모리아 산의 시험을 통과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모리아 산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라랏 산 하나님 말씀] 아라랏 산 הר אררט(하르 아라라트)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라랏 산 하나님 말씀 중에서 아라랏 산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창세기에 나오는 아라랏 산을 통해서 신약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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