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민수기 33장 설교말씀 중에서 숙곳의 장소를 통한 아브라함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숙곳 – 아브라함”(민33:5, 마1:2)
♣명제: 숙곳은 거처를 예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곳이다.
♣목적: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거처를 준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대장정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유월절 날에 어린양의 고기를 먹고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피의 역사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인생을 청산하는 날이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라암셋을 떠날 때에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면서 라암셋을 출발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430년 동안 노예의 삶을 살았습니다. 고통의 삶을 살았던 날들을 뒤로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원죄의 삶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인생을 살았습니다. 영원히 율법의 종살이로 살았던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몰랐기 때문에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롬10:3-4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우리들은 원죄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상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의를 세우려고 열심히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선택받은 믿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죽었던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이 고통을 당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모든 원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끊어진 것입니다.
‘모르고’ αγνοεω(아그노에오 50 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 알지 못하다, 이해하지 못하다, 깨닫지 못하다, 잘못 생각하다, 라는 뜻입니다. 원죄에 빠져있는 인간은 절대 하나님의 의를 모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을 때는 하나님에 관하여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원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있든지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같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분사와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들은 현재 주님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원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자들은 인간의 의를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복종하지’ ύποτασσω(휫포탓소 5293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복수, 3인칭) 복종하다, 순종하다, 라는 뜻입니다. 원죄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절대복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뜻에 따라 인생을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원죄에 빠진 자들은 실제로 십자가의 의에 복종하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실합니다. 그 이유가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더 놀라운 것은 이미 창세전부터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의에 도전하고 복종하지 않기로 작정된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 시제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고 싶어도 복종이 안 됩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도 그렇게 살아가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수동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하여 내가 움직여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여 살아가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만세전에 하나님 안에서 선택받은 자들은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의에 복종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은혜가 있기 때문에 나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나를 원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라암셋에서 애굽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이끌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라암셋은 부활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곳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재림하셔서 나를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까지 가는 것처럼 나를 영원한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라암셋을 출발하여 첫 번째 도착하여 진을 친 곳이 바로 숙곳입니다. 숙곳은 애굽의 비돔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기 전에 진을 쳤던 장소입니다.
민33:5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진을 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의 생활에서 해방되어 처음으로 자유인이 되는 곳을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의 식사법은 특이합니다. 유월절 날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서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통해서 노예생활에서 해방되고 난 후에는 옆으로 누워서 음식을 먹게 됩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노예의 신분이 아니라 자유자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들도 라암셋과 같이 원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노예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의 어린양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받고 자유자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이 되었고 음식을 먹을 때에도 서서 먹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옆으로 누워서 음식을 먹는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해 주시니 이제 나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일까요? בן חר(벤 1121 호르 2715) 귀족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종의 삶에서 자유자가 되었다는 것은 귀족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나에게 해주셨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자유롭게 귀족의 아들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율법의 노예의 삶을 살아야 마땅한 인생을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귀족의 아들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라암셋에서 빠져나와 숙곳으로 진을 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라암셋과는 영원히 멀어졌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죄와 영원히 상관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는 라암셋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나도 다시는 원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숙곳에 진을 친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 보겠습니다.
‘숙곳’ סכות(숙코트 5523) 오두막, 장막, 이라는 뜻이며 סכך(사카크 5526) 울타리를 치다, 둘러싸다, 덮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숙곳은 장막이며 오두막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신부를 위하여 거처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신랑과 신부가 정혼하고 나면 1년 동안 신랑은 신부와 함께 신혼생활을 할 장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신부는 신부수업을 받으면서 신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보호할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와 함께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결혼식을 올릴 때에 천막 밑에 들어가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신랑이 신부를 보호해 주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천막을 ‘후파’라고 합니다.
이것은 חפה(후파 2646) 덮개, 방, 이라는 뜻이며 חפף(하파프 2653) 에워싸다, 둘러싸다, 덮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덮어서 보호해 주고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신방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시19: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태양은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방’ 이라는 단어가 חפה(후파)입니다. 해와 같은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인 나를 보호하시고 은혜로 덮어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오두막과 같은 처소를 준비하려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신부인 나와 함께 거처할 장소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자신에게로 영접하여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나를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숙곳은 바로 주님과 내가 함께 거할 장소를 마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은혜로 덮음을 받고 보호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곳에 숙곳과 연결될 수 있는 인물이 있는데 첫 번째 구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첫 번째로 구속사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숙곳과 연결하여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뀐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름이 바뀐 것을 통해서 무엇을 우리가 깨달을 수가 있습니까? 먼저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히브리어로 보겠습니다.
창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의 나이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브람’ אברם(아브람 87) 아브람이며, ‘고귀한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가정의 아버지로 인생이 끝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 나이가 86세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나이 99세까지 13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 죽어 있었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괴롭고 힘든 시기를 아브람이 보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때가 어떤 시기를 의미하고 있습니까? 사생애의 기간이며 원죄에 빠져 죽었던 시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라암셋에서 살고 있었던 시기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육체로는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시기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아브람과 같은 신앙의 상태는 아닙니까? 내가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매일같이 나타나는 결과는 이스마엘을 낳고 있지는 않습니까? 율법의 종의 삶은 괴롭고 힘들고 지칠 뿐입니다. 열심히 일은 하지만 결과는 매일같이 하나님 앞에 죄만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아브람과 같은 상태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의 종노릇 하는 시기라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고 복음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 אברהם(아브라함 85) 아브라함이며, ‘아버지는 높임을 받으신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동안 침묵하셨던 하나님이 아브람 나이 99세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높임을 받으신다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시면서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그럼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이름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아브람에는 ה(헤)가 없는데 아브라함에는 하나님께서 ה(헤)를 넣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숨구멍이라는 상형에서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13년 동안 영적으로 죽었던 아브람에게 숨을 불어넣어 숨을 쉬게 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원죄에서 죽었던 영혼을 십자가 복음으로 살려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되면서 공생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숙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어주심과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주시고 보호하여 주셔서 할례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아브람으로 있을 때에는 할례 언약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받고 생명이 들어가고 나니 몸에 흔적을 받게 되는 할례 언약을 거행하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숙곳과 같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었다면 주님의 십자가 복음의 덮개로 덮어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할례의 언약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인침입니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내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약속의 성령의 인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할례의 언약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할례 언약은 몸에 흔적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에 구원의 흔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들어가고 난 후에 흔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씨인 이삭을 낳게 됩니다. 그럼 사래는 어떻습니까?
창17: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네 아내의 이름도 사래이지만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이름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래의 이름도 바꾸어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래의 이름을 통해서 영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래’ שרי(사라이 8297) 사래이며, 왕비, 여지배자, 라는 뜻입니다. 사래의 삶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아이를 얻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왕비처럼 인생을 살았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화려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과 영적인 것은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혹시 우리들도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율법에 빠져 겉으로만 화려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겉치레를 중요시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래와 같은 신앙입니다. 이런 자들은 마음이 공허하고 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마음속에 없기 때문에 괴롭고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으며 원죄에 빠져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사라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사라’ שרה(사라 8283) 사라이며, 왕후, 귀부인,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신 후에 이삭을 낳게 됩니다.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왕후이지만 사래는 세상적으로 왕비였다면 사라는 영적으로 왕후가 되고 귀부인이 되어 이삭을 낳는 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사래와 사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숨구멍을 상징하는 ה(헤)가 사래라는 단어에는 없지만 사라라는 단어에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주셔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래는 원죄에 빠져 죽어있던 상태를 의미한다면 사라는 원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으로 숨구멍이 열려 살아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문이 열려 이삭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올 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바꾸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원죄에서 해방되어 살아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라암셋에서 나와 처음으로 진을 친 숙곳을 통해서 영적인 의도를 깨달았습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족보 중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숙곳이 연결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부활하셔서 나의 거처를 준비하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신부수업을 받아야 합니다. 신부수업은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찬양하는 것이며 기도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람과 같이 영적으로 원죄에서 죽어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어주셔서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생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주님을 위한 공생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부터 숙곳과 아브라함을 통해서 영적으로 깨달은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시고 헌신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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