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성경식물 하나님 말씀] ‘가시와 엉겅퀴’ קוץ(코츠), דרדר(다르다르)

기혼샘 2020. 11. 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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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경식물 하나님 말씀 중에서 가시와 엉겅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는 창세기 성경말씀 중에서 나오는 것으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땅이 저주를 받으면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죄의 대가로 고통의 식물을 먹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시와 엉겅퀴는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나의 저주를 가져가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님의 부유함과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주님의 저주받은 사건을 가시와 엉겅퀴를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가시와 엉겅퀴’ קוץ(코츠 6975), דרדר(다르다르 1863)

 

명제: 가시와 엉겅퀴는 저주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목적: 저주받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를 통해서 원죄에서 살아났다.

 

가시와 엉겅퀴는 성경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고통의 식물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최초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하와를 미혹하였고 하와는 자신이 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아담에게 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하와가 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어버렸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담은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만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을 통해서 땅이 채소를 내는데 가시덤불과 가시가 있는 엉겅퀴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대가입니다.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고통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땅에서 열심히 수고해야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가시와 엉겅퀴가 나옴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심히 땀을 흘려 먹는 것들을 보면 가시가 있습니다. 고통의 소산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쌀을 보면 벼이삭입니다. 벼는 끝에 가시가 달려있습니다. 고통의 소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보리와 밀도 주식입니다. 고대근동의 사람들은 보리와 밀을 주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가시가 달려있습니다. 저주의 소산입니다. 과일 종류도 복숭아를 보면 가시가 달려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들이 죄를 짓고 고통의 소산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해 주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한 아담으로부터 들어온 저주를 자신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끊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시와 엉겅퀴는 고통과 고난을 당하시고 저주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저주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럼 땅에서 나오는 가시와 엉겅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알아보겠습니다.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을 하자 이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저주받은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담이 먹을 것은 밭의 채소라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은 קוץ(코츠 6975) 가시나무, 들 가시, 라는 뜻이며 어근은 קוץ(쿠츠 6972) 잘라내다, 몹시 싫어하다, 원망하다, 잠에서 깨어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가시덤불은 인간이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 하나님의 의에서 잘려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죄지은 인간은 원죄를 짓게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몹시 싫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됨으로 원죄가 들어왔고 모든 자들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들은 모두가 숨을 쉬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입니다. 원죄에 빠져 죽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마27: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유대인들은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면서 빌라도에게 넘겼고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께 씌었습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주님은 희롱당하시고 수치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가시로 관을 엮었는데 이 가시가 קוץ(코츠)입니다.

예수님이 머리에 쓰신 가시관은 바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아담이 가지고 들어온 모든 저주의 죄를 담당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인간들이 받아야 할 형벌의 저주를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심으로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나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심으로 가져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원죄를 몹시 싫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죄인인 내가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었고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생명에서 잘려나간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서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시고 영원히 죽었던 나를 죄에서 깨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이유입니다. 나의 원죄가 사라졌고 모든 저주가 사라진 것입니다.

 

‘씌우고’ επιτιθημι(에피티데미 2007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 복수, 3인칭) 두다, 놓다, 더하다, 주다, 라는 뜻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놓았습니다. 고대 근동의 가시를 보면 끝이 안으로 구부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가시로 낚시를 만들어 고기를 잡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시관을 만들었으니 머리에 들어갈 때는 쉽게 들어가지만 빠질 때는 가시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나의 원죄 때문에 저주를 끊어주시려고 고통을 당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저주를 끊어주시려고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신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신화가 아니고 실제로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시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창세전부터 예수님이 이렇게 가시관을 쓰시기로 계획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로마 군병들에 의하여 고통의 가시관을 쓰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나를 위해 고통당하시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주님을 믿으면 저주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인생의 저주의 가시를 거두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인생의 가시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엉겅퀴’는 דרדר(다르다르 1863)입니다. 어근은 דרר(다라르) 넘치게 흐르다, 풍부하다, 풍성하다, 빛을 비추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엉겅퀴는 가시가 돋아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지면 가시에 찔리게 됩니다. 죄악 된 인간들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아 엉겅퀴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저주를 받은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인간은 모든 것이 가시와 같은 것들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도 가시가 섞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의 가시가 섞인 말만 했습니다.

 

마7:15-16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양의 옷을 입고 있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의 열매로 이들을 알 수 있는데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에 저주가 그대로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백성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신 모든 저주를 가져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가 나오는 엉겅퀴와 같이 십자가에서 대 못에 박힌 것입니다. 저주받은 백성들의 가시를 대신 십자가에서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마27: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예수님은 엉겅퀴와 같은 가시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 못에 박혀 성취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하여 가시의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넘쳐흐르게 하셨고 생명수가 넘쳐흐른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원죄에서 살아나서 풍성한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엉겅퀴와 같은 가시의 저주를 받으셨지만 이것이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빛이 된 것입니다. 태양과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나에게 임하여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 빛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가시나무는 악한 자에게 비유하였습니다.

 

삼하23:6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다윗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손으로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악한 자들은 가시나무와 같아서 옆에 있으면 손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교회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율법을 주장하여 피해를 주고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사기를 치는 자들입니다.

 

‘사악한 자는’ בליעל(벨리야알 1100) 무가치함, 무익함, 파멸, 이라는 뜻입니다. 사악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전혀 가치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의 모든 행동과 말은 남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백해무익합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은혜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무가치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삼상2: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사사시대의 엘리의 제사장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행실이 나빴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행실이 나빴다는 단어가 בליעל(벨리야알)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의 표상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물에 손을 대고 성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일들을 주저함 없이 했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무가치하게 살았던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었고 다음은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들을 강간했던 것입니다.

 

‘내버려질’ נדד(나다드 5074 동사, 호팔, 분사수동, 남성, 단수) 길을 잃다, 방황하다, 도망하다, 피하다, 라는 뜻입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악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 세상에서 방황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결국 가인과 같은 인생이 되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항상 영적인 방황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고 고통의 길만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구원의 길에서 탈락될 것이 지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팔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가시나무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해결이 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무가치한 삶을 살면서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어 무가치하고 절대 필요치 않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가시나무와 같아서 손으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가시를 손으로 잡으면 자신만 손해입니다. 혹시 교회에서 우리가 이와 같이 가시나무와 같은 인생을 살면 안 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 앞에 죄만 짓고 구원의 확신도 없으면서 전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겉으로는 자신의 직분을 내세워 목사이니, 장로이니, 권사이니, 집사이니, 하고 있다면 가시나무와 같은 백해무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자들은 아직도 저주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행동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손해만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를 위해 가시에 찔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됩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가시와 같은 대못에 찔리셨습니다. 내가 찔려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찔리시고 나의 저주를 가져가신 것입니다. 헛되고 무익한 삶을 살았던 내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חלל(할랄 2490 동사, 푸알, 분사수동, 남성, 단수) 꿰뚫다, 꿰찌르다, 피리를 불다, 더럽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가시와 같은 대못에 손과 발이 꿰뚫렸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나의 가시와 같은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더럽혀짐을 당하셨고 주님 때문에 나는 기쁨의 피리를 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영원한 저주에서 풀려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죄악의 저주를 담당하셔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엄청난 가시의 저주를 주님이 당하시고 선택받은 나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절대 피할 수 없는 가시의 고통의 저주를 주님이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곤욕을 당하시고 괴롭힘을 당하셨지만 전혀 고통이 있다고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자들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호팔형을 사용하여 지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하여 도수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도록 호팔형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끌려가는’ יבל(야발 2986 동사, 호팔,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가져오다, 이끌다, 인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택받은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원죄의 저주를 모두 십자가에 짊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골고다로 독생자 예수님을 인도하셔서 십자가에서 가시와 같은 저주를 담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든 가시와 엉겅퀴의 저주를 예수님께서 짊어질 수밖에 없도록 지명하여 죄를 지정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은 나의 죄를 계속해서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원죄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시나무와 같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원죄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시나무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지명이 되었다면 선택받은 자들은 나의 저주의 가시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어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고 죽으실 것이 지명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었더니 나의 가시와 엉겅퀴의 저주는 끝났습니다. 원죄의 저주가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가시와 엉겅퀴를 통해서 나의 질병의 저주가 끝났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원죄의 고통의 죄악이 끝났습니다. 가난의 고통의 저주가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저주를 끊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가시와 엉겅퀴를 통해서 깨달은 영적 진리가 무엇입니까? 아담의 죄로 인하여 영원한 저주가 임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저주는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벗을 수가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가시와 엉겅퀴의 저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가시관을 쓰심으로 나의 원죄의 고통과 이 세상에서의 가난과 질병의 저주까지도 담당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대못을 찔리심으로 가시와 같은 저주를 담당하셨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악한 자와 같은 가시나무의 삶을 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가시와 같은 삶을 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교회에서 가시가 돋아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아서도 안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의 입술에는 항상 감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난과 질병과 영혼의 모든 죄악의 가시의 저주를 가져가신 것을 믿음으로 이 시간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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