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원문 성경강해

[요한복음 3장 헬라어 강해] 독생자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영생(요 3:16-21)

기혼샘 2021. 6. 1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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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3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독생자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영생이라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복음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주님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죽습니다.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의 불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우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시간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독생자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영생(요 3:16-21)

 

16절 후토스 가르 에가페센 호 데오스 톤 코스몬 호스테 톤 휘온 아우투 톤 모노게네 에도켄 히나 파스 호 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 메 아폴레타이 알르 에케 조엔 아이오니온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6

복음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天命)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포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 5:20, 23; 8:36 ).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보내다'(send)'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죽음'을 나타낼 때(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 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에도(요이 8)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17절 우 가르 아페스테일렌 호 데오스 톤 휘온 아우투 에이스 톤 코스몬 히나 크리네 톤 코스몬 알르 히나 소데 호 코스모스 디 아우투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7

심판하려 하심이... 구원을 받게 하려 -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하나'에 의해 이끌리는 두 문장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not..., but... 식의어 문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5:30; 8:16)에 관해 ,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12:48)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5:22) 증거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날 재림하실 때 에는 분명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이다(딤후 4:1, 8).

그러나 적어도 예수의 초림 목적을 말할진대는 심판보다는 구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로되,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롤 원하시며(딤전 2:4)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까지 하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천재지변(天災地變)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심판하다'의 뜻인 '크리노''선과 악을 분별하다'(discriminate), '분리하다'(separate)의 의미와 '정죄하다'(condemn)의 의미가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구원을 받게'란 말은 본절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의 뜻인 '소테리아'란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본 구절의 의미는 죄악 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justification)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한다.

18절 호 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 우 크리네타이 호 데 메 피스튜온 에데 케크리타이 호티 메 페피스튜켄 에이스 토 오노마 투 모노게누스 휘우 투 데우

요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3:18

저를 믿는 자는... 벌써 - 앞의 두 절에서 요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의 초림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제 본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심판이 불가피하게 될 것임을 설명한다. 그는 이 진리를 즐겨 사용하는 논리 전개 방식인 부정과 긍정의 연결을 통해 변증하고 있다. 심판 가운데 처해 있으므로 마지막 대심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예(後裔)로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구속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원과 멸망 이 두 편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심판을 받은 - 완료 시제 '케크리타이'는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었고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을 나타낸다. 불신자들은 장차 있을 종말론적인 대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삶(즉 정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

19절 아후테 데 에스틴 헤 크리시스 호티 토 포스 엘렐뤼덴 에이스 톤 코스몬 카이 에가페산 호이 안드로포이 말론 토 스코토스 에 토 포스 엔 가르 포네라 아우톤 타 에르가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3:19

이것이니 - 논리 전개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 요한의 독특한 표현을 반영하는 어구이다(15:12; 17:3; 요일 1:5; 5:11, 14).

빛보다 어두음을 더 사랑한 것 - 여기 사용된 ''의 헬라어 '포스'는 달빛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빛'을 의미하는 말로, 본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유일한 빛'(the one light), '참 빛'(1:9)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어두움의 뜻인 헬라어 '스코토스'는 빛과 반대되는 완전한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순히 어두운 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Westcott). 따라서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처해 있는 자는 빛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빛이 적극적으로 비춰들 때 비로소 그 빛을 인정한다. 그러나 빛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그 빛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고리고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하는 표현이 믿지 않는 자들이 빛도 어느 정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뤼케(Lucke)말하기를, ''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론'이라는 단어가 '오히려'의 뜻보다'더 많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빛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랑을 인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론'이 사용된 다른 많은 구문에서는 그 뜻이 '비교급'으로 보다는 부정 적인 의미에서의 '... 보다 도리어'(rather)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43; 10:6; 딤후 3:4). 따라서 본 구절은 빛보다는 어두움 즉 하나님과의 영생의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을 사랑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20절 파스 가르 호 파울라 프랏손 미세이 토 포스 카이 우크 에르케타이 프로스 토 포스 히나 메 엘렝크데 타 에르가 아우투

요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3:20

19절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원인을 나타내는 전치사 '가르'가 사용되었. 19절에서 이 전치사는 사람들이 죄악 된 길을 택하게 된 원인을 설명해 주며 본절에서는 19절에서 밝혀진 원인을 보충 설명한다. 앞절에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한다고 하는 소극적 어투로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보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악행'을 지적한다.

특히 본절은 더욱더 죄악으로 치닫는 인간의 성향에 대해 도덕적 이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므로 빛보다는 어두움을 택하며 더 나아가 죄로 점점 오염될수록 악행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드러날까 - 헬라어 '엘렝코''죄를 깨닫게 하다'(convince) '히 드러나다', '혐의를 두다', '교정하다'(correct) 등의 뜻을 지니는 바 악을 행하는 자가 죄를 감출 뿐만 아니라, 이미 지은 그 죄에 대해서 회개조차 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21절 호 데 포이온 텐 알레데이안 에르케타이 프로스 토 포스 히나 파네로데 아우투 타 에르가 호티 엔 데오 에스틴 에이르가스메나

요 3: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21

진리를 좇는 자 -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 그 신앙의 열매(3:8, 10)를 맺는 자'(A. M. Hunter) 즉 참된 기독교적인 신앙과 삶을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진리'의 의미나 본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논의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 이 진리의 빛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심령을 뚫고 들어 오면 회개와 전인적 삶의 변화가 수반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빛으로 오나니 - '에르케타이 프로스 토 포스''빛에게로 나아오다'란 뜻이다. 사람이 빛 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원래의 자기 자신의 기원(起源) 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charlesw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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