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창세기 8장 성경 주석강해] 아라랏산 방주 정착(창 8:1-22)

기혼샘 2024. 3. 12.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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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8장 성경 주석강해 설교말씀은 방주가 아라랏산에 멈춘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노아의 방주를 아라랏산에 멈추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8가족에게 축복하셨고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구원의 방주인 예수님 안에 있으면 저주받지 않고 구원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라랏산 방주 정착(창 8:1-22)

 

I. 물이 줄어듬 (1) 8:1-3

1.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이것은 인간적인 표현 방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 중 어느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법이 없으며(눅 12:6), 더욱이 그의 백성 중 한 사람이라도 결코 잊어버리시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49:15,16).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심은 인류에 대한 그의 긍휼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류를 완전히 없애려고 하시지 않았다. 노아 자신도 비록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였지만 방주 안에서 잊혀져 버린 듯인 보였다. 필시 그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갇혀 있어야 하며 언제 풀려날 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경건한 사람들도 때때로 특별히 고난이 극심하고 오래 지속될 때에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잊어버림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쉬운 법이다. 믿음이 돈독한 노아라도 이치를 놓고 따져 볼 때 홍수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된 후에도 그것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자기를 닫아 넣으신 분께서 계속해서 자기를 가두어 놓으시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여 이렇게 호소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느 때까지 나를 잊으시겠나이까?'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그리하여 이 사실은 하나님이 그를 기억(권념)하셨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2. 바람과 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2,3)

사람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제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마음대로 다루신다.

(1) 하나님께서 홍수를 물러가게 하시기 위해 바람을 명하여 '오라'고 말씀하시자 바람이 왔다.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하나님께서 노아에 관해 무엇을 기억하셨는가? 그것은 그를 구원하시는 일이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바람을 다스리시는 것은 어떤 주권적 통치인가? 광풍조차도 그의 말씀을 좇는다(148:8). 이제 하나님께서 바람을, 곧 말리는 바람을 보내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홍해를 가르실 때 보내셨던 것과 같은 바람이다(14:21).

(2)하나님께서 물을 명하여 '가라'고 말씀하시자 곧 물이 물러갔다.

1)하나님께서 원인을 제거하셨다. 하나님은 여는 열쇠를 가지고 계시듯이 닫는 열쇠도 가지고 계시며 심판의 원인들을 중지시키심으로써 심판의 진행을 멈추게 하실 수도 있으시다. 황폐를 가져온 그 손이 또한 구원도 베푸신다. 상처를 주시는 그분만이 홀로 치료하실 수 있다(참조, 12:14,15).

2)그러자 그 결과가 그쳤다. 그것은 단번에 모두 그친 것이 아니라 차차 그쳤다. 보통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점진적으로 이루신다. 그러므로 평범한 날이라고 무시할 수 없고 큰 일을 당하는 날이라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참조, 4:18; 슥 4:10).

. 물이 줄어듬(2) 8:4,5

여기서 우리는 물이 줄어들어 나타난 결과와 증거를 보게 된다.

(1) 방주가 머물렀다. 이 사실로 인해서 노아는 자기가 타고 있는 집이 땅에 고정되어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어느 정도 만족을 얻었다. 그 방주는 노아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그는 방주를 조정하지 않았다)하나님의 지혜롭고 은혜로운 섭리에 의해서 지시받은 산 위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아마도 좀더 신속하게 머물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어려움을 주신 후에는 그들을 위하여 쉴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주신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알맞고 위로가 될 생활의 안정을 마련해 주시는 데 있어서 흔히 그들의 계획이나 예상을 초월하여 인도하신다.

(2)산꼭대기들이 마치 물 위로 드러나 있는 작은 섬처럼 보였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분명히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는 일 외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할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루한 항해 끝에 육지를 보기를 갈망하는 선원들처럼 그들은 매일같이 방주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의 계산대로 하자면 그들은 배가 땅에 걸렸다는 것을 느낀 지 40일 이상이 지나서야 땅을 보게 되었다. 라이트푸트는 물이 비례적으로 감소하였다면 그때 방주는 물 속에 11규빗이 잠겨 있었으리라고 추론한다.

.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어 마른 땅을 정찰함 8:6-12

여기에는 노아가 밖의 소식을 얻기 위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정찰로 내어 보낸 기사가 있다.

(1)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홍수가 언제 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씀하셨으나 그 홍수가 어느 때 어떤 식으로 '물러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계시해 주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전자에 대해서는 그가 방주를 준비하는 데 필요하였기 때문에 알아야 하는 것이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지식이 단순히 그의 호기심만 만족시켜 주는 것에 불과하므로 그의 믿음과 인내를 단련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그에게 비밀로 하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둘째, 계시에 의하지 않고는 홍수가 언제 올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나 물이 줄어드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노아는 비록 자신이 풀려날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인내로 기다렸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너무 오래 갇혀 있다고 생각한 사람처럼 그 점에 관해서 몹시 알고 싶어했다. '믿는 자는' 하나님 보다 앞서 달리기 위해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만나러 가는 일에는 서두른다(28:16).

1)노아가 방주 창문으로 까마귀를 내보내니 까마귀가 나갔다. 히브리 표현법대로 하자면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즉 날아다니다가 쉬기 위해 방주로 돌아왔다. 필시 방주 안에서 쉬지 않고 방주 위에서 쉬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아에게 별로 만족을 주지 못했다.

2)그리하여 그는 비둘기를 내보냈다. 비둘기는 처음에는 아무런 좋은 소식도 없이 단지 털이 물에 흠뻑 젖어 더러워진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처음으로 따낸 것처럼 보이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부리로 물어 가지고 왔다. 그것은 이제 나무들이 곧 유실수들이 물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는 징표였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 점을 유의하자. 첫째, 노아는 처음 비둘기를 내보낸 지 일주일 후 두 번째 비둘기를 내보냈고 또 일주일이 지난 후에 세 번째를 내보냈다. 그리고 아마 비둘기를 최초로 내보낸 것도 까마귀를 내보낸 지 일주일이 지난 다음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일이 안식일에 행해 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볼 때 노아는 방주 안에서도 안식일을 경건하게 지켰던 것 같다. 둘째, 비둘기는 은혜를 받은 영혼을 상징한다. 그 영혼은 세상에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떤 안식도, 견실한 평강이나 만족도 찾지 못하므로 그의 방주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다.

육신적인 마음은 까마귀처럼 이 세상에 흥미를 느끼며 거기에서 얻는 썩은 고기를 먹고 산다. 노아가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받아 방주 안에서 들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로 날아와 안식을 찾는 자들을 은혜롭게 보존하시고 도우시며 환영하신다. 셋째, 감람나무 잎사귀는 평화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그 감람나무 가지를 맹금인 까마귀나 화려하고 교만한 공작이 가져오지 않고 유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비둘기가 가져왔다. 영혼에 안식과 기쁨을 가져오는 것은 비둘기 같은 성품이다. 넷째, 어떤 사람들은 이 일들을 우화적으로 해석한다. 처음에는 율법이 까마귀와 같이 보내졌으나 아무런 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가 차차 성령께서 주님 위에 내리셨던 모양대로 비둘기와 같이 그의 복음을 보내셨다. 그리고 이 복음이 우리에게 감람나무 가지를 선물한다. 즉 더 나은 소망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 땅이 마름 8:13,14

(1) 땅이 말랐다(13). 즉 모든 물이 정월 초하루(그날은 즐거운 새해 첫날이었다)에 걷혔다. 노아 자신이 친히 그 사실을 목격하였다. 그는 방주 주변의 땅을 살피기 위해 '방주 뚜껑을 젖혔다.' 그리고 그는 매우 즐거운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보라, 보라, 놀랍게도 땅이 말랐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유의하자.

1)우리 주변의 땅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자비이다. 노아는 이 사실을 우리보다 더 민감하게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가 회복될 때가 자비를 계속해서 누리는 경우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2)이제 지면을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고통을 받아 근심에 쌓인 영혼의 얼굴과, 박해를 받아 괴로워하는 교회의 얼굴을 새롭게 할 수 있다.

(2) 노아의 가족이 충분히 거주할 수 있을 만큼 땅이 말랐다(14).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보다는 우리의 유익을 고려하신다. 우리는 땅이 마르기도 전에 방주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문이 닫혀 있다면 금방이라도 뚜껑을 젖히고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때가 가장 적절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그때는 긍휼이 우리를 위해 무르익고 우리는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때이다.

V. 방주에서 나옴 8:15-19

(1)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에서 내보내셨다(15-17).

1)노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을 하시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고 그의 통치에 복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2)하나님께서는, 비록 오랫동안 그를 가두어 두셨지만 마침내 그에게 해방을 주셨다.

3)하나님께서 '방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들어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나오너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가거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그와 함께 들어가신 하나님께서 그를 안전하게 내보낼 때까지는 내내 그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2) 노아는 나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를 떠났다. 노아는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 자신이 방주 안에서 보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이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것에 대해 불평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아서 밖으로 나왔다. 둘째,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제외하고 자기와 함께 방주에 들어갔던 모든 짐승을 데리고 나왔다. 필시 까마귀와 비둘기는 이미 밖에 나와 있었으므로 짐승들이 나올 때 자기 짝을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노아는 자신의 책임에 대해 매우 훌륭한 보고를 드릴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맡은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노아의 제사와 하나님의 약속 8:20-22

1. 하나님께 대한 노아의 감사 제사(20)

노아는, 구원의 긍휼을 이루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베푸신 사실에 대해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20).

(1) 그는 '단을 쌓았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와 그를 바라는 찬송을 기뻐하신다. 노아는 이제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자신을 위한 집을 짓는 일을 가장 시급한 문제로 생각할 만한 춥고 황폐한 세상으로 나왔다. 그러나 보라. 그는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기 시작한다. 1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가장 먼저 섬김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자가 시작을 잘하는 자이다.

(2) 그는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단에 드렸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그는 정결한 짐승들만 제물로 드렸다. 둘째, 비록 가축의 수가 적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죽음에서 건진 짐승들이었지만 그는 그 중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있는 적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그것을 더욱 많아지게 하는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지는 것을 헛되이 낭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셋째,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음을 알게 된다. 새 세상에서 행하여진 첫 번째 일은 예배하는 일이었다(6:16). 이제 우리는 번제로서가 아니라 찬미의 제사와 의의 제사로써 곧 경건한 헌신과 생활로써 우리의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2. 노아의 감사 제물을 하나님이 열납하심(21,22)

(1)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매우 기뻐하셨다(21). 그는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 혹은 히브리 원문대로 하자면 그 제사에서 '안식의 향기를 흠향하셨다.' 하나님은 노아의 경건한 열심과 새로운 세계의 이러한 희망 찬 출발을 매우 기뻐하셨다. 죄인들의 세상을 잠재우기 위해 진노를 일으키셨던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이 소수의 남은 신자들을 쉬게 하시기 위해 사랑을 일으키셨다.

(2) 이어서 하나님은 다시는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으시리라는 결심을 하셨다. 여기에 믿을 수 있을 만한 분명한 보증이 주어진다.

1)이러한 심판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노아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머지않아 이 세상은 그 사악함 때문에 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파멸하고 말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세상이 고쳐져야 하는가?"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아니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시는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는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곧 "내가 더 이상 이처럼 혹독한 방법은 쓰지 않으리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오히려 동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심판은 사람들 안에 거하는 죄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처럼 타락한 인종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심판뿐이었다.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고 불린다(48:8). 따라서 사람이 그처럼 믿을 수 없게 행동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사람이 육체임을 기억하신 것이다.' 또한 만일 사람이 당연한 보응에 따라 다루어진다면 그들 중 하나도 남김없이 다 멸절할 때까지 계속해서 홍수가 일어나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외적인 심판들이 비록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조심케 할 수는 있으나 그 자체로써 사람을 성화시키거나 새롭게 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하려면 그러한 심판들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작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에게만 있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에도 있지 않다.

2)자연의 진행이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그리고 땅 위에 사람이 있을 동안에는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있을 것이다. 비가 내리고 있었을 때처럼 내내 밤만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씀에서 이 땅이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히 암시된다. 땅이 존속하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섭리가 규칙적인 시간과 계절의 연속을 보존할 것이고 각자의 위치를 지키게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존재하고 자연의 수레바퀴가 그 궤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이 섭리의 은혜에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이 섭리의 은혜에 의해서이다.

시간이란 참으로 변화무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변하지 않는가를 보라. 첫째, 자연의 과정은 언제나 변한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서로 바뀐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연의 과정은 이러한 변화속에서도 변치 않는다. 태양이 계속해서 그처럼 확실하게 시간을 재고 있는 한, 그리고 달이 하늘에서 그처럼 충실한 증인 노릇을 하고 있는 한, 계절의 변화는 결코 중단되지 않고 앞으로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낮과 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다. 낮과 밤이 결코 쉬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결코 변할 밤이 결코 쉬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은혜 언약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언급된 말씀이다(33:20,21)

[사무엘상 18장 설교말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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