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누가복음 예수님의 말씀] 재림을 준비하는 절대적 신앙(눅 12:1-59)

기혼샘 2022. 1. 1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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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환난의 날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육적인 욕심에 싸여 살다 보면 영적인 것을 준비하지 못하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심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 때문에 육체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라는 고민 때문에 영적인 것을 준비하지 못하면 마지막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의 재림이 도둑같이 임하여 심판을 받게 됩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절대적 신앙(눅 12:1-59)

 

1-12,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 . . .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한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그를 부정하고 그를 무시하는 것이며, 겉으로는 깨끗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미움과 음란으로 가득한 것이다. 외식은 일종의 거짓과 속임이다. 외식은 누룩과 같이 조용히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며, 그래서 교회를 형식적이게 만들고 생명력을 잃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식과 형식주의를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거짓과 악을 미워하신다. 시편 5:4-6,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마태복음 23:33에 보면, 주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2-3]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주께서는 다른 경우에 제자들이 예수께 개인적으로 배운 진리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전파하라는 뜻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으시나(10:26-27),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의 감추인 악들이 다 드러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다. 감추인 악들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들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바리새인들의 은밀한 탐심과 미움과 음란 등은 다 드러나고 말 것이다. 세상에 은밀한 것이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추인 악들을 버리고 정정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은밀하게 남을 비난하여 형제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말고 충고할 것이 있으면 대면하여 충고하는 것이 옳다.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 . . .

예수께서는 또,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몸의 죽음으로 사람의 생명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몸의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 단지 그것이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몸의 죽음 후의 영혼의 상태는 심판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더 무엇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인 후 그를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요한계시록 1:17-18에 보면, 주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말씀하셨다.

지옥은 불못이다. 지옥 교리는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5:29-30,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가복음 9:43-49,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불의]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은 전통본문임).

또 요한계시록 21:8은 지옥 불못을 분명히 증거한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지옥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최종적으로 내리시는 공의로운 형벌이다. 죄인들은 지옥 불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6-7]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앗사리온은 데나리온 은전의 16분의 1의 값이 나가는 동전이다. 하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기도 하고 또 잡혀 죽기도 한다. 인간은 참새보다 귀하다. 사람은 그 머리털까지도 하나님 앞에 다 세신 바 되었다. 그는 우리를 아시고 잊지 않으시고 귀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핍박이나 불안한 장래의 일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8-9]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人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말씀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인정하고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주께서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인정하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마음 속으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적인 신앙고백을 원하신다. 바울은 로마서 10:9-10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했다.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人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 . . .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人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의 인성(人性)에 가리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단순히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알고 거역한다면 그는 사하심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의 영광이 때때로 드러나고 그의 하신 일이 명백히 성령으로 된 것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일들을 보고도 그것을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매우 완악한 자이며 구원의 가망이 없는 자일 것이다.

[11-12]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초대 교회 시대는 예수님 믿는 일 때문에 핍박을 받았던 시대이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제 시대와 같았고 공산 치하의 때와 같았다. 믿는 이들은 유대교 회당들에서도 심문과 핍박을 받고 세상 권세자들 앞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주께서는 그 일을 예견하시면서, 그들이 어떻게 또 무엇을 변명하며 말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그때에 마땅히 할 말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심문들을 통해 유대의 무지한 종교지도자들에게나 세상의 위정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외식을 조심하자.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식할 때나 다른 사람을 두려워할 때 외식하기 쉽다. 속에는 불경건과 믿음 없음, 불의와 악함, 거짓이 있으면서, 겉으로는 경건하고 믿음 있는 척하며 의롭고 정당하고 선한 척하며 진실한 척하는 것이 외식이다. 그것은 일종의 거짓이며 속임이다. 외식은 누룩과 같아서 다른 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교회 안에 외식자들이 있으면 교회는 급속히 부패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의와 악함과 거짓을 미워하신다. 물론 외식도 미워하신다. 외식은 가증한 죄악이다. 우리는 외식을 경계하고 항상 진실을 말하고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베드로전서 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거짓과 외식을 경계하자.

둘째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자. 사람은 우리의 몸만 죽일 수 있지 그 이상은 무엇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죽이신 후에 우리의 영혼을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분이시다. 사람의 영혼은 몸의 죽음 후에도 불멸하며 존재한다. 영혼 불멸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그것은 심판과 부활의 진리에 전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악령들과 악인들을 위해 지옥을 예비하셨다.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불못이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할 때 시험에 빠지고(29:25), 또 외식하게 되고 심지어 변절하게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새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기억하시고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심판자 하나님만 두려워하자.

셋째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자. 만일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치 않으면 주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치 않으실 줄 알자. 또 우리는 재판정 앞에서 무슨 변명을 할지 염려하지 말자. 성령께서 우리의 할 말을 가르쳐주실 것이다.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입으로 간증하자. 또 예배당에 나올 때 성경책을 들고 오며, 식사 때에 기도하며, 집에서나 직장에서 쉴 때 성경책을 읽으며 전도하자.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와 온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시인하자.

13-21, 탐심을 물리치라

[13-14]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 . . .

무리 중에 한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그의 형이 부모의 유산을 다 가지려 했던 것 같다. 율법에 의하면, 부모의 유산은 비록 장자가 동생보다 두 배를 얻지만(21:17) 동생도 나누어 가지도록 되어 있었다. 즉 동생은 부모의 유산의 3분의 1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형은 그 유산을 다 가지려 한 것 같으니, 그것은 잘못이며 형의 욕심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동생의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물건 나누는 자라는 원어(메리스테스)는 ‘중재자, 조정자라는 뜻이다(BDAG). 예수께서는 그런 일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주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인간의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때에는 그 형이 유산을 정당하게 분배했는지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또 그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또 그는 전도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그러므로 그는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16:15).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명하신 전도의 일에 힘쓰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그의 제자들은 그의 명하신 전도의 일에 힘썼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교훈했다(딤후 4:2). 교회는 세속적인 일들에 관여하지 말고 영혼 구원의 전도의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라든지 고아나 노인들이나 빈민을 구제하는 선한 일도, 교회가 직접 관여하거나 운영할 일은 아니다. 교회는 정당을 세운다든지 일반 학교나 병원이나 고아원이나 양노원 등을 만들어 경영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국가나 사회 단체들이나 그 일에 사명을 느끼는 개인들이 할 일이다. 교회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과 전도자들이나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탐심을 주의하고 경계하라](전통본문).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형은 부모의 유산을 혼자 다 독차지하려는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생도 탐심을 주의해야 했다. 그도 물질을 더 가지려는 탐심을 품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탐심을 주의해야 한다. 부자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탐심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탐심을 가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제10계명에서 “탐내지 말라”고 명하셨다. 탐심은 더 가지려는 마음이다. 그것은 돈을 크게 여기는 마음이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듣고 싹이 나오나 세상 염려와 돈에 대한 생각과 육신의 쾌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8:14).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말했다(3:5-6). 또 그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딤전 6:9-10).

물질적 부요는 큰 시험거리이다. 사람은 부요할 때 마음이 해이해지고 교만해지고 쾌락에 빠지기 쉽고 외도하기 쉽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경계하며 교훈하였다(8:12-14).

그러므로 성도는 부요함을 구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으로 자족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잠언 30:7-9는 지혜자의 교훈을 기록하기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했다(딤전 6:6-8).

[16-19]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 . . .

예수께서는 물질적 부요가 헛됨을 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한 부자가 그의 밭에 소출이 풍성하므로,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하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 부자는 그가 한 곡식 추수와 얻은 풍성한 수확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적당한 비를 내려주지 않으셨다면 풍년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의 관심과 생각은 풍성한 소득과 그것을 즐기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 . .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농부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셨다. 그 부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다 어리석은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살면서 그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사람이 바르게 사는 길도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부요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또 자신의 건강과 생명과 행복이 어디로부터 오는지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물질적 만족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의 영혼을 그 날 밤에 불러가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을 언제든지 불러가실 수 있다. 그가 부르시면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가 그 날 밤 그 영혼을 불러가시면, 그의 예비한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그가 죽고나면 그의 쌓아놓을 많은 곡식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며 다른 누군가가 누리게 될 것이다. 그의 생명은 그의 소유의 넉넉함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물질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 유익할 뿐이다. 물질은 그의 생명을 하루라도 연장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누구나 가야 한다.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 . . .

주께서는 그 비유의 결론으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위해 돈을 벌고 돈을 모을 줄은 알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는 자들은 바로 이 어리석은 농부와 같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이 비유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굳게 믿고 깊이 사랑하는 자이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요셉 등 신앙의 열조들이 그러한 자들이다. 창세기 5:21-24,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사야 26:3-4,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이사야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시편 73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73:25-2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받아서 오직 주의 일에 힘쓰는 교회가 되자. 그것은 영혼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바른 말씀만을 힘써 전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세상적인 일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와 양육 외에 전도와 개척교회들 설립과, 바른 일꾼들 양성과, 문서와 인터넷을 통한 말씀 사역에 힘써야 한다. 디모데후서 4:2-5,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둘째로, 우리는 탐심을 주의하자. 탐심은 제10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다. 그것은 물질을 중시하는 우상숭배적 죄악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신앙의 장애물이다. 우리는 부하려는 마음과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정당치 않은 이익, 더러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되며 적은 소득이라도 정당하게 얻은 것으로 살아야 한다. 부자들은 그 부요로 구제와 선행에 힘써야 한다. 모든 성도가 구제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가 되자.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굳세고 하나님을 사랑함이 많아 그를 위해 살며 일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날마다 성경책을 읽고 많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라는 것이고 또 우리의 인격과 삶이 조금씩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이며 또 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고 또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요셉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형통함을 누리다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22-34,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22-23]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 . . .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먹는 것과 입는 것은 사람이 사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하루 24시간 중에, 먹는 일을 위해 쓰는 시간은 대략적으로 장보기 1시간, 음식 만들기 1시간 30, 식사하기 1시간 30, 설겆이 하기 1시간, 도합 약 5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먹을것과 입을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살고 또 무엇을 입어야 산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옷이 필요하다.

또 사람은 미래의 불확실함 때문에 그런 문제로 염려하기도 한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그런 것들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을까? 그것들이 생활에 중요한 부분인 만큼, 그것들에 대한 염려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음식과 옷이 중요해 보이지만, 실상 목숨을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이고 몸을 위해 옷을 입는 것이다. 즉 음식과 옷은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한 도구와 수단에 불과하다. 음식과 옷보다 목숨과 몸은 더 중요하다. 따라서 사람이 음식과 옷에 대한 염려 때문에 몸을 상하거나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24-26]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저장실]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그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새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먹고 살 수 있도록 얼마나 더 보살피시며 섭리하시겠는가?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셨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목숨을 위해 직장 생활이나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일을 얼마나 더 보살피시고 도우시겠는가? 그것은 그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에 비하면 작은 일이다. 보잘것없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것도 택한 백성을 먹이시지 않겠는가? 또 우리가 무엇을 염려한다고 우리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먹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27-28]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자연만물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는 인간이 자기 지혜로 만든 그 무엇보다 뛰어나시다.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땔감으로 불에 태워지는 풀들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입히신다면, 하물며 자기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잘 입히지 않으시겠는가?

이와 같이, 창조주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연만물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더욱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한다고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염려와 근심은 몸을 상하게 하고 우리의 목숨을 위태하게 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된다. 우리는 그런 문제에 매이지 말고 다 하나님께 맡기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

[29-30]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음식과 옷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섭리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염려하며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심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시다. 그는 하늘의 모든 새들과 땅의 모든 짐승들, 그리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들도 먹이시고 기르신다. 더욱이, 그는 자기 독생자의 피로 구속(救贖)하신 신약 성도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도 사랑하시고, 우리의 영혼의 필요뿐 아니라, 우리의 몸의 필요도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장차 이루어질 영광의 천국을 주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세상에서 먹고 입고 거처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 . . .

예수께서는 또, “오직 너희는 그의[하나님의](전통본문)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오직이라는 원어(플렌)는 강한 대조를 나타내는 말이다. 음식과 옷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뜻이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땅의 일들만 생각하는 데 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지식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복으로 충만한 나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본래의 관계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그것이 죄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본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의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 본성이 부패되어 스스로 이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택자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우리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랑하고 성경책을 읽고 거기에 기록된 그의 뜻을 즐거이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과 옷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는 제자들을 적은 무리[양무리]’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 비해 너무 적은 수의 무리이다.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은 많고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은 적다. 택한 백성들은 불택자들에 비해 그 수가 적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서 위축될 수 있을 것이다. , 물질 만능의 시대에, 가난한 자와 부자의 격차가 더 심해지는 오늘 시대에 물질을 초월하며 사는 성도들은 세상에서 위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 천국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복되고 가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의 행복과 가치를 바로 안다면 우리는 결코 찬란해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으로 인하여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의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또 그가 주시는 천국을 확신하고 기쁨과 담대함으로 그를 따라가야 한다.

[33-34]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주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다. 그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말씀하셨다. 구제는 참 성도의 삶의 특징이다. 구제는 천국에 저축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다(6:19-20). 우리는 재산을 땅에 축적하지 말고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이 세상만 아는 자는 자신의 행복만 구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는 사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우리는 주의 명령대로 구제하며 살아야 한다. 탐심을 버리는 자만 주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다.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성도는 이 명령에 복종하고 실천해야 한다. 구제의 대상은 우선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이다. 초대교회는 이것을 실천하였다. 또 교회의 복음 사역자들은 세상 직업을 버리고 주의 일에 헌신한 자들이다. 교회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은 합당하다. 구제는 천국에 저축하는 것이다.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는 우리의 마음도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음식과 옷의 문제, 넓게는 의식주의 문제로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자. 우리는 공중의 까마귀를 생각해야 하고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그것도 자기 독생자의 피로 구속하신 자들을 더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염려와 근심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말씀대로, 음식은 썩는 양식이지만, 믿음은 썩지 않는 것이다(6:27-29). 또 계명 순종은 바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미가 6:8은 하나님의 뜻이 공의를 행하고 인자(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디도서 2:14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을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특히 구제하는 삶을 힘써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구제는 천국에 저축하는 것이다. 잠언 19:17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구제 헌금을 풍성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고후 8:7). 또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자신도 본래 구제에 힘쓰고 있다고 간증했다(2:10). 성경은 부자들이 구제에 힘쓰라고 가르친다(딤전 6:18).

35-48, 예비하고 있으라

[35-36]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의 결혼식은 밤에 행해졌고 따라서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밤 늦게야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종들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자지 말고 깨어 기다려야 하였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충성된 종들처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교훈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제(前提)하신 말씀이며 그것은 영광스러운 천국의 임함과도 관계된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것은 충실한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하라는 뜻이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약교회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언제 오시든지 그를 맞을 수 있도록 진실히 그를 믿고 섬기며 따라야 한다.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께서 돌아오실 때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자들은 복되다. 주께서는 우리를 자리에 앉히시고 친히 띠를 띠고 우리를 대접하실 것이다. 이것은 너무 황송한 말씀이다. 어떻게 영광스런 주께서 우리에게 그런 대접을 하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충성된 종들과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된 약속이며 위로의 말씀이다.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 . . .

예수께서는 또,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저녁에 해 질 때부터 아침에 해 뜰 때까지의 밤을 일경, 이경, 삼경, 사경의 넷으로 나눴다. ‘이경은 대략 오후 9시부터 자정까지를 가리키고, ‘삼경은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를 가리킨다. 밤은 환난의 때를 상징하는 것 같다. 성경은 주님의 재림 직전에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24:3-31).

결혼식에 간 주인은 날이 새기 전에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주인이 결혼식에 갔다가 한밤중에 올지라도 종들이 자지 않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으면 복되듯이,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시간에 그를 기다리다가 맞이하는 종들과 성도들은 복되다. 주께서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22:20). 그러므로 비록 그가 늦게 오신다고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그를 확신하고 섬기며 따르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 . . .

예수께서는 또,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의 재림을 도적에 비유하셨다. 그것은 그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을 가리킨다. 도적이 집주인이 알 수 없는 시간에 집에 침입하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갑자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재림을 항상 기다리며 깨어 준비하는 자가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고 또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 . . .

예수께서는 또,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하신 교훈의 요지는 모든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고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충실한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반드시 하늘로부터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의 약속은 참되다. 그러나 그 시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성경에 증거된 대로 그가 확실히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항상 그를 맞을 준비를 하면 된다.

[41-42]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 . . .

베드로가,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라고 말하자, 주께서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비유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집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지혜 있고 충성된 청지기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의 양무리들에게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먼저 깨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또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교인들은 목사의 신앙 사상과 인격, 또 신앙 상태나 정도와 함께 간다. 목사와 교인들은 함께간다. 목사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런 유의 교인들이 모일 것이다. 세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는 목사에게는 그런 유의 교인들이 모여들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부패되어서 교인들이 부담 없는 신앙생활,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해이한 신앙생활이며 세상적인 신앙생활이다. 그것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신앙생활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성경은 우리가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 권면하며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히브리서 10:23-25,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43-44]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그는 항상 깨어 그를 기다리며 맡겨진 일에 충성한 목사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며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들에게 맡기실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주께서는 그의 충성된 종들의 충성된 사역들에 대해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주의 약속을 믿고 세상에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해야 할 것이다.

[45-46]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엄히 때린다는 원어(디코토메오)는 ‘여러 조각들로 자른다, 극히 엄한 벌을 내린다는 뜻이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라는 원어는 불신자들이 받을 몫을 주리라는 뜻이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고 오히려 교인들을 학대하거나 먹고 마시고 취했던 악한 종들은 극히 엄한 벌을 받고 불신자들과 함께 취급될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엄하게 보응하실 것이다.

[47-48]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의 심판은 공정할 것이다. 악하고 불충성된 일꾼들은 그들이 가진 지식의 정도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받은 책임의 정도에 따라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자들은 잘 몰라서 행하지 못한 자들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큰 책임을 가지고도 충성치 못한 자는 작은 책임을 가진 자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직분이 크면 책임도 커진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말과 행실에 있어서 일반 성도보다 더 나은 모범과 열심을 가지고 충성해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경고대로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 주의 재림을 부정할 것이지만(벧후 3:3-4),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주의 재림을 확신하며 요한과 함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자.

둘째로, 우리는 예비하고 있자. 그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그것은 경건한 삶과 순종의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또 가족들과 이웃들을 위해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죄를 멀리하고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하고, 또 기회 있는 대로 전도해야 한다.

셋째로, 재림하시는 주께서는 우리의 선악간의 행위에 대해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49-59, 불을 던지러 오심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 . . .

예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의미하신 불은 무엇인가? 주께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이 불이 아직 땅에 붙지 않았다고 암시하셨다. 이것은 성령의 불을 가리키신 것 같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기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말하였다(3: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 이루신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오순절에 성령께서 세상에 내려오셨다. 사도행전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증거하였다. 불같은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 내려오셨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요(요엘, 이사야, 에스겔) 예수께서 친히 약속하신 바이었다(14-16; 1).

성령의 불은 우선 죄를 소멸하는 불이다. 성령께서 오신 첫 번째 목적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구속(救贖)하신 영혼들을 중생시키시는 일이다. 그것은 죄를 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죄를 소멸시키는 불의 역사이다. 그것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받는 일이다(눅 24:47). 그 일이 성령께서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전 6:11).

성령의 불은 또한 능력의 불이다. 주께서는 성령을 능력과 동일시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셨고(눅 24:49),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1:8). 이 불은 복음 전파를 통한 영혼 구원 운동의 불이다. 영혼 구원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의 불은 또한 분열의 불이다. 이 불은 주의 말씀의 문맥으로 볼 때 복음으로 인해 일어나게 될 분열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복음과 구원 운동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나누며, 이때 진리와 비진리, 의와 불의, 성령과 악령의 싸움이 있다. 이 분열과 싸움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또 이 싸움은 때때로 핍박으로 나타난다. 신자는 영원하신 창조자 하나님을 믿고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때문에 이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는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 . . .

예수께서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가 받으실 세례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켰다. 그는 성경 다른 곳에서 세례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셨다. 마가복음 10:38,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그의 답답하심은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그의 인간적 마음의 고통과 더불어 그 고난을 통해 아버지의 명하신 구원의 일을 이루시려는 그의 간절한 소원을 나타낸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인간의 삶을 사셨다.

[51-53]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이사야 9:6에 평강의 왕으로 예언된 메시아이시며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11:28) 예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고 분쟁을 주려 왔다”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쟁이라는 원어(디아메리스모스)는 ‘분열, 나누임을 뜻한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 믿음과 불신앙, 구원과 멸망의 분열과 나누임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과 사탄, 의와 불의는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면 세상은 항상 그 진리를 따르는 자와 그 진리를 거부하는 자로 나뉠 것이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은 많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은 적을 것이다(7:1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그를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16:16). 그것이 복음의 성격이다. 복음은 분열을 가져온다. 복음은 사람들을 둘로 나눈다. 그것은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로 나누는 것이다. 복음은 심지어 집안 식구들을 둘로 나누며 신앙 문제로 서로 갈등하게 만든다. 그 나뉨과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다. 52절과 53절에 분쟁하리라는 원어(디아메리스데세타이)는 ‘나뉘리라, 분열하리라는 뜻이다(BDAG).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러므로 시편 73편 저자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그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요구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10:34-39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이러한 절대적 믿음과 사랑은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을 일으킨다. 그것은 가정에서부터 그러하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한 갈등은 가정복음화의 시작과 과정인 경우가 많다. 먼저 믿은 식구들이 바라는 것은 가족들이 결국 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영원히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따르다가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가족적 구원이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16:31).

사회의 복음화도 마찬가지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다(16:15).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의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웃을 구원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마귀는 자기의 권세 아래 있는 죄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도들의 생애가 그러했듯이, 전도 사역에는 이방 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오해와 미움과 핍박이 예상된다. 전도와 구원 운동은 영적 전쟁이다. 거기에는 갈등과 분열이 불가피하다. 진리와 비진리 간에는 타협과 일치가 불가능하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나뉘며 최종적으로도 나뉠 것이다.

[54-56]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 . . .

예수께서는 또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분변하다’는 원어(도키마조)는 ‘시험하다, 분별하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사람들이 날씨와 기후를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를 분별치 못한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메시아로 오셨고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함을 가리키신 것이라고 본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은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증거되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주께서는 세례 요한이 옥중에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한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7:22).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많은 일들과 기적들은 그가 그리스도이신 충분한 증거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거리를 찾았고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메시아 시대의 징조를 분별치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었다.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예수께서는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다. 옳은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키는 것 같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진리는 옳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죄를 떠나야 하며, 또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믿고 의지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은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증거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옳은 것을 알지 못하고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였다.

[58-59]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아펠라크다이)[놓여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官屬)에게 넘겨주어 관속(官屬)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조금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세상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지만,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용된다.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모세 곧 모세의 율법이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즉 아직 우리의 목숨이 끝나기 전에, 아직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우리의 죄를 다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죗값을 완전히 갚기 전에는 영원한 감옥인 지옥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실상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자신의 죗값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죄인들에게 아직 죄사함과 구원을 받을 기회가 있다. 지금은 아직 은혜 받을 만한 때이며 아직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전해지고 있고,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직 들려지고 있다. 아직은 사람들이 길 가는 중에 있고 아직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자신의 죄에서 놓여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령의 불을 받자. 그것은 중생의 불이다. 그것은 죄를 소멸하고 씻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경은 그것을 성령 세례라고 부른다.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들은 성령의 불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또 성령의 불은 성령 충만함도 가리킨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힘입어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화의 능력이다.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또 그것은 봉사와 전도의 능력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12:6). 우리는 성령의 불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둘째로, 우리는 분열을 두려워하지 말자. 성령의 불은 또한 분열의 불이다. 그 분열은 하나님과 주 예수께 대한 절대적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분열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야 한다. 우리는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한다. 누가복음 12:8,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셋째로, 우리는 시대를 분별하자. 메시아께서 오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성경은 그 사실을 충분히 증거한다. 사람들은 아직 길에 있을 때 하나님과 화목하고 죄에서 놓여나야 한다. 아직 구원의 문이 열려 있고 아직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써 죄사함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대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예수님의 말씀]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마 24:1-51)

 

[마태복음 24장 예수님의 말씀]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마 24:1-51)

마태복음 24장은 종말장으로서 예수님이 종말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이 오면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고 심판하게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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