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성경식물 성경공부] ‘쥐엄나무’ חרוב(하루브), κερατιον(케라티온) 눅15:13-16

기혼샘 2020. 11. 8.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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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경식물 성경공부 중에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쥐엄나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둘째 아들이 먹었던 쥐엄 열매는 가난과 궁핍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탕자가 먹었던 쥐엄 열매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의미를 공부해 보겠습니다.

 

 

‘쥐엄나무’ חרוב(하루브), κερατιον(케라티온 2769)

 

명제: 쥐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궁핍을 상징한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도 예수님 때문에 궁핍과 가난에 처할 수도 있다.

 

쥐엄나무 열매는 이스라엘 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입니다. 쥐엄나무 열매는 생김새가 콩 꼬투리와 같고 4월 정도에 파랗게 달렸다가 익게 되면 검게 변하게 됩니다. 이 열매를 따다가 저장해 두고 식량이 떨어지면 삶아서 죽으로 쑤어서 먹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주식은 보통은 밀입니다. 밀로 맷돌에 넣어 갈아서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지면 보리를 먹었습니다. 더 극심한 가뭄이 들어 밀이나 보리도 먹을 것이 없어지면 그때서 비상식량인 쥐엄나무 열매를 먹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쥐엄나무 열매는 가난과 궁핍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엄청난 가뭄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영적으로 포도주와 감람유와 같은 최고급 음식을 먹다가 궁핍해지면 쥐엄나무와 같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항상 먹을 수 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쥐엄나무는 이 땅에서 고난과 고통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래 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해질 필요도 없는 분입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이 먹는 쥐엄나무의 열매처럼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가난해지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나를 부하게 만들어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이 땅으로 비하(卑下)되어 오셔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에 채찍과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로마 병사에게 따귀를 맞으시면서 침 뱉음을 당한 것이 바로 쥐엄나무 열매처럼 천한 자가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에게 복음을 주셨는데 최고의 포도주와 감람유가 되어 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면 나는 영적으로 곤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은 나에게 최고의 영적 음식이 되었고 영혼이 곤핍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시간 우리가 쥐엄나무를 통해서 가난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나 때문에 가난해지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가난을 주님이 가져가시고 주님의 부함을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영적으로 우리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면 영적으로 쥐엄나무 열매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인물이 성경에서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눅15:13-16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와 같이 살다가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불효 막심한 짓입니다. 아버지 보고 먼저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뜻에 따라 분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마음에 근심이 찾아왔고 아들 걱정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그때 당시에 가족 사회였습니다. 가족을 떠난다는 것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거리를 찾을 수도 없고 어려움이 찾아와도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둘째 아들은 재산이 있기 때문에 신이 났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분깃이 얼마 가지 않아 없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이 찾아왔을 때에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예측은 적중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하더니 다 없어졌습니다. 쉽게 벌은 재산은 쉽게 나가는 법입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가난해졌는데 먹을 것도 없고 궁핍해진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나라의 한 사람에게 붙어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돼지를 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돼지를 치면서 먹을 양식을 구해야 하는데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이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살면 결국 영적으로 먹을 것이 없고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유대인인데 돼지를 치고 있다는 것은 최하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돼지를 만지고 있다는 것은 둘째 아들은 부정한 직업과 부정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 분깃을 가지고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잘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내가 가지고 나온 은혜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면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고통당하면서 힘든 인생을 살게 되고 영혼은 피폐해져 결국은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 삶이 바로 탕자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양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먹을 양식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순종하면 기근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사1:19-20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즐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고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즐겨’는 אבה(아바 14 동사, 칼, 미완료, 남성, 2인칭, 복수) 즐기다, 청종하다, 기뻐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받아들여 따르면 아름다운 소산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매일 청종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소산을 먹게 됩니다. 하지만 배반하게 되면 칼에 삼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칼에 삼켜진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넣었다 뺐다 하면서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칼’은 חרב(헤레브 2719)이며 어근은 חרב(하라브 2717) 마르다, 진멸하다, 황폐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면 칼에 진멸되고 영혼이 황폐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칼이라는 단어가 쥐엄나무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חרוב(하루브)와 חרב(헤레브)는 자음이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순종하지 않으면 가뭄이 들어 쥐엄나무 열매를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삼켜지리라’는 אכל(아칼 398 동사, 푸알, 미완료, 남성, 2인칭, 복수) 먹다, 소비하다, 삼키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면 결국 가뭄이 들어 쥐엄나무 열매를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푸알형을 쓰는 것은 이러한 상황과 환경을 피할 수 없는 상태가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면 세상에서 경제적 기근이 몰려오게 됩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망하게 되고 잘 나가던 직장에서 퇴직하게 되고 잘 나가던 학업이 막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어 늘 기도하고 십자가 복음의 말씀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칼에 삼켜질 일이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곤핍한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조금 힘들고 어렵게 살 수는 있지만 영적으로는 항상 주님 안에서 풍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쥐엄나무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 성경에서 또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할 자로 엘리야의 사명을 받고 온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이때 세례 요한이 먹었던 음식이 메뚜기와 석청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모습을 연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세례 요한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은 광야입니다. 광야에 풀도 없고 건기가 6개월씩이나 되는데 메뚜기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또한 꿀이 생기기 위해서는 벌이 있어야 하는데 광야에서 벌을 구경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메뚜기라는 단어는 חגב(하가브 2284)입니다. 그런데 쥐엄나무는 חרוב(하루브)입니다. 유대인들은 하가브와 하루브가 비슷하기 때문에 쥐엄나무를 메뚜기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발음상 비슷하기 때문에 통념적으로 이렇게 의사소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메뚜기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쥐엄나무 열매를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쥐엄나무 열매를 ‘‘세례 요한의 빵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쥐엄나무의 영명이 ‘Locust tree(메뚜기 나무)’입니다.

 

그럼 세례 요한이 먹었던 메뚜기는 실제로 날아다니는 메뚜기를 먹었던 것보다는 가난한 자들이 먹을 수밖에 없었던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쥐엄나무 열매를 먹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힘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힘과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복음의 말씀을 주시니 어려움이 올 때마다 승리하면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증거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먹었던 석청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대추야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벌을 구경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꿀을 따기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여리고 에는 많은 종려나무가 있고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열매인 대추야자를 꿀이라고 표현합니다.

 

레19: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곡식을 거들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삭도 다 줍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밭모퉁이’ פאה(페아 6285) 모퉁이, 구석,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먹을 양식을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양식을 남겨주시지 않으면 절대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남기지 않고 다 수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퉁이와 같으신 분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욕을 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축자들은 이 돌을 버린 것입니다. 돌을 버렸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모퉁이 구석에 남겨 놓아야 할 양식을 전혀 남기지 않고 자신 스스로 먹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영적으로 죽었던 가난한 자들의 양식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행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에게서 버려진 돌입니다. 그런데 이 돌이 집 모퉁이 구석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의 모퉁이 돌이 되어주신 분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배가 터지도록 욕심을 부려 모퉁이의 양식도 모두 거두어들였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어 모퉁이의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나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퉁이의 구석의 양식을 먹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식을 먹음으로 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모퉁이의 양식을 먹게 됩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려나무의 열매인 대추야자가 땅에 떨어지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남겨두게 됩니다. 이것이 바위틈에 떨어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위틈에 떨어진 대추야자를 석청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먹는 쥐엄나무 열매와 대추야자를 먹으면서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는데 말씀을 광야에서 선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쥐엄나무를 통해서 깨달은 영적 진리가 무엇입니까?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은혜를 주시고 영적 양식을 주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세례 요한과 같이 청빈의 삶을 살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옵니다. 그래도 세상의 부귀영화를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복음을 따라가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가난하게 된 것은 나를 부하게 해주시려고 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섬기시고 선포하시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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