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야고보서 4장 강해 설교말씀] 탐욕, 비방, 자랑을 버릴 것(약 4:1-17)

기혼샘 2022. 6. 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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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장에서는 세속적인 삶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세상 정욕에 빠져 신앙을 버리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정욕적인 것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위해서 구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욕심에 의해서 구할 때가 있습니다. 정욕적인 것을 구할 때는 하나님께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육체의 욕심을 위해서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탐욕, 비방, 자랑을 버릴 것(약 4:1-17)

 

1-10, 세상과 벗이 되지 말라

[1-3]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 . . .

야고보는 말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가지려 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사람들 간의 싸움은 대체로 욕심 때문에 일어난다. 때때로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 간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는데, 그 원인도 대체로 욕심 때문이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였다. ‘정욕이라는 원어(헤도네)쾌락, 욕망을 의미한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이라는 말은 중생한 신자의 본성 속에도 거룩한 마음과 성향을 대항하여 싸우는 육신적 욕망이 있음을 보인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을 성령의 원하시는 것과 싸우는 육체의 욕구라고 말했다(5:16-17). 이 둘이 서로 싸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11에서 영혼을 거스려[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영혼은 중생한 영혼의 변화된 지배적 성향을 가리킨다. 그 성향은 경건과 의와 선과 진실만을 지향하는 성질이다. 중생한 성도들의 이러한 변화된 새 성향과 육신의 죄악된 본성의 욕심이 서로 싸운다. 그리고 이러한 죄악된 욕심이 사람들 간의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육신의 죄악된 욕심들이란 이 세상 중심적인 것들로서 육신의 정욕, 물질욕, 명예심 등이다. 천국을 바라는 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이런 세상의 욕심들을 버릴 수 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성도는 자신을 부정하고 빈 마음으로 그것을 감사히 거저 받는다. 성도의 순종은 결코 대가를 바라는 순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응답하는 감사의 순종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자가 영적인 눈이 어두워 이 세상적 이기심과 명예심 등의 욕심을 가진다면 여전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도 싸움과 다툼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인정하고 그런 세상적 욕심들을 다 버린다면 서로 다투고 싸울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야고보는 또 말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성도들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을 수 있으며, 이렇게 기도의 효력을 아는 자들은 항상 기도하기를 힘쓰며 영육의 부족함이 조금도 없는 삶을 살 것이다. 다윗은 시편 65:2에서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주께서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 또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7:7-8). 이것은 놀라운 약속이며 성도의 특권이다.

그러나 신자가 악한 동기와 의도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지 않으시고 주지 않으실 것이다. 악을 품은 기도는 결코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누구든지 이 세상적인 욕심을 품고 그것을 위해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며 그는 결코 구한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구한 것은 그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칼을 달라고 할 때, 엄마가 그것을 그 아이에게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에게 구하는 것들 중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 주실 것이며, 해가 되는 것은 결코 주지 않으실 것이다.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 . . .

야고보는 말한다. “간음하는 [남자들과](전통사본)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간음한다는 말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다 적절하다. 육신적으로 간음하는 것은 육신적 욕망을 따라 행하는 육체 사랑이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영적으로 간음한다는 것은 우상숭배, 세상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 등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보다 무엇을 더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뜻에서 탐심은 우상숭배이다(3:5).

간음하는 자들은 세상과 벗된 것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진노와 심판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은 세상의 욕망을 다 버림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다(요일 2:15-17).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 . . .

야고보는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성령께서는 신자들 속에 거하신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사랑할 때 우리를 향해 시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 중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20:4-5). 그는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섬기거나 의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질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사랑, 명예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참으로 이 세상의 욕망들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내세 천국만을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더욱 큰 은혜란 세상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 욕심을 극복하여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하는 은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편에서도 성실해야 한다. 우리는 우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교만과 세상 욕망은 친구이다. 교만은 이 세상적인 명예심에서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7-10]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 . . .

야고보는 말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 한다. 우리가 마귀를 물리칠 때 마귀는 우리를 피하여 떠나며,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 우리는 마귀와 죄악된 욕심들을 물리치고 성경을 더 많이 더 자주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므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죄인들은 손을 깨끗이 해야 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둘 다 사랑하려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마음을 성결케 해야 한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적 욕망들과 명예심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며 사랑하고 내세 천국만 바라보아야 한다. 또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과거의 삶을 슬퍼하고 애통해야 하며,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진실한 믿음의 종들과 성도들을 이 세상에서도 옛날의 요셉처럼, 또 다니엘처럼 높이실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적인 욕심들을 다 버리고 이 세상과 벗이 되지 말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가까이 해야 한다. 이 세상적인 욕심들이 다툼의 원인이며 이 세상 것을 사랑하고 탐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이 세상 사랑과 이 세상 욕심들을 극복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아 이 세상적 욕심들을 다 버리고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만 바라며 살아가자.

11-12, 피차 비방하지 말라

[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 . . .

야고보는 말한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성도들은 피차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다(7:1-5).

야고보는 우리가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로, 그것은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율법이 가르치는 사랑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가 있고 흠과 부족이 있다. 우리가 서로 상대방의 흠과 부족을 찾아 비난하기 시작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며 서로 큰 상처만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하는 것이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둘째로, 그것은 우리가 율법의 준행자이지 판단자나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율법을 주셨고 모든 사람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것이다. 그가 어떤 이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실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을 그들의 죄에 대해 공의로 판단하셔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리실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죄씻음과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겸손히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진리의 교훈은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교회적, 공적 판단과 비평의 사역을 금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종이며 교회의 파수꾼된 목사들은 교회의 성결과 건덕(健德)을 위해 필요할 때 판단과 비평을 해야 한다. 이런 사역은 교회의 권징의 일로 표현되기도 한다. 목사들은 설교시에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게 해야 한다. 오류를 책망하고 바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주신 목적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했다(딤후 3:16). 예레미야서에 보면, 구약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거짓된 평강을 설교하였으나, 백성에게 진정한 평강은 없었고 있을 수 없었다(8:11). 왜냐하면 죄를 회개함이 없이는 참된 평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참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선언하였었다.

특히, 구약시대에 선지자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거짓 선지자들을 혹독히 책망하였듯이(23; 34), 신약시대에도 초대교회 때부터 거짓 목사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들이 필요하였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다(1:6-9). 또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말하기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고후 11:4, 13-15).

베드로도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거짓 선생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고 했다(벧후 2:1-3). 유다도 그의 서신에서 쓰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고 했다(3-4).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역사상 찾아볼 수 없게 심히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고 포용하고 교리적 순결성과 교회적 순결성을 강조하지 않고 인본주의적인 연합과 일치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히 두려운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의 죄악에 대해 책망하고 외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로마서 14장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종들의 판단과 비평의 사역을 반대한다. 거기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말했다(14:1-4). 그러나 그 말씀은 성경에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문제, 즉 성경에 명백히 명하지 않았거나 금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개인의 견해와 확신의 자유를 허용하는 말씀이다. 예를 들어, 날과 절기에 관한 것과 먹는 음식에 관한 것이 그러하였다(14:5-6).

그러나 성경은 다른 여러 곳들에서 명백한 오류와 죄악에 대해서는 판단할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17-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말하였고,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단순하다. 우리는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우리는 다 법을 지키는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결점을 찾아 그를 비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새 계명을 지키고 상대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자.

그러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종들이 성도들과 교회의 성결과 건덕(健德)을 위해 교회적, 공적 판단과 비평을 하는 것을 성경에 위배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오히려 주의 종들이 그런 사역을 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는 대다수의 주의 종들이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교회 안의 잘못된 풍조들을 지적하고 책망하지 않고 침묵하는 데 있다. 오늘날은 교회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일들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하고 비판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필요하다. 목사들의 이런 사역을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이 신실한 성도들과 교회들에게 있다. 영적으로 혼탁해져가는 시대에 하나님의 바르고 온전한 뜻이 성실히 다 선포되기를 기도하자.

13-17, 헛된 계획과 자랑을 버리라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 . . .

야고보는 말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 중에라는 말은 이 교훈이 일차적으로 교인들에게 주신 것이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님을 보인다. 물론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 교훈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님을 알며 섬긴다는 자들인데 바르게 살지 못하므로 그들에게 이런 교훈을 주신 것이었다. 당시의 교인들 중에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 없는 헛된 계획이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계획은 다 헛되다.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 . . .

야고보는 말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무엇이뇨 함이라.]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것이지, 내일 무슨 일이 우리에게 생길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 ‘안개라는 원어(아트미스)수증기, , 연기등의 뜻이다. 수증기가 공중에 올라갈 때 무엇이 있는 것 같지만 잠시 후에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이 사라져 버리듯이, 인간은 살아 있을 때에는 존재하는 것 같지만, 죽으면 땅에 묻을 시체만 남는다. 시편 39:4-6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15-17]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성도는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의 시작과 마지막 곧 출산과 죽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하였다. 하와가 가인을 낳았을 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4:1)고 말한 것은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모든 육체의 생명[‘영들’]의 하나님이여라고 불렀다(16:22). 욥은,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했고(12:10), 다니엘은 하나님을 “[벨사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 주께서는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그 농부의 영혼을 오늘밤에 도로 찾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12:20).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라고 불렀다(17:25).

성도는 주의 뜻이면 우리가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한다. 성도의 모든 활동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언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며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했다.

헛된 계획은 말로 표현될 때 헛된 자랑이 된다. 헛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권자 하나님을 무시하며, 또 보장 없는 일을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성도가 헛된 계획을 하고 헛된 자랑을 하는 것은 다 악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만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열심히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딛 2:14). 이것이 인생의 바른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따라 선하게 살아야 한다.

13절부터 1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의 삶이 안개와 같이 헛된 것을 알고 헛된 계획과 헛된 자랑을 버리자. 왜냐하면 그런 계획과 자랑은 주권자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불확실한 미래를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을 앞세워 그의 뜻이면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또 그의 뜻을 따라 선한 일에 힘쓰자. 그것이 신본주의요 바른 신앙의 태도이다. 우리는 세상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성도답게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선을 행해야 한다.

[디도서 2장 성경 좋은 말씀] 바른 교훈에 합한 삶(딛 2:1-15)

 

[디도서 2장 성경 좋은 말씀] 바른 교훈에 합한 삶(딛 2:1-15)

디도서 2장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나 집사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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