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성경 강해 말씀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면 안 됩니다.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영원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인가?(롬 1:1-17)
파리에서 죄수 한 사람이 여자로 분장하고 탈옥을 했습니다. 목소리도, 몸짓도, 옷차림도 영락없이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도시 중심가에서 아주 쉽게 체포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패숀 의상이 걸려있는 양장점 앞을 이 사람이 그냥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여자라면 그냥 지나갈 리가 있겠습니까? 이와 비슷한 얘기가 한국에서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 한 분이 무단 탈출을 했습니다. 이 환자는 평소에 자기가 남자인데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유달리 옷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을 하다가 아마도 명동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가 보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패숀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그를 쉽게 찾았다고 합니다.
이 두 개의 에피소드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인식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죄수는 여장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여성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남성처럼 행동하고 만 것입니다. 반대로 정신병원의 환자는 자기가 남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여성이라는 여성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여성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그만큼 내가 누구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느냐 하는 자기 정체인식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내가 어떤 태도를 갖고 삶을 사느냐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기 정체감 혹은 자기 정체인식(Sense of Identity)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 사도의 유명한 자기의 정체인식에 대한 고백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자기 자신을 누구로 인식하고 있었느냐를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본문이 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까. 다시 말하면 바울이 자기를 누구로 느꼈느냐가 오늘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왜 중요성을 갖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바울은 가장 상징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시대를 살아간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그리스도인 이것이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의 자기 인식은 어떤 면에서 우리들 자신의 자기 인식이 되어야만 하겠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바울은 자기만 그렇게 느끼고 인식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6절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즉 바울은 자기 얘기를 한 다음에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너희도-로마에 살고 있는 너희들도- 이 말 속에는 오늘날 20세기를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 자신을 누구로 인식했습니까? 우리는 본문 1절의 그의 유명한 고백을 통해서 바울의 자기 인식을 세 가지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종이라는 말을 들을 때 이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까? 종이라면 자유가 없는 사람의 이미지를 제일 처음 떠올리게 됩니다. 종이라는 단어를 표기할 수 있는 희랍어 단어가 몇 가지가 있는데 바울사도는 그중에서도 자기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주인에게 철저하게 예속되었다는 의미를 가진 둘로스(doulo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인 나 바울은 ..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종이라고 하면 주인에게 억압당하고 무시당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종의 이미지를 그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의미로만 사용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실 구약에도 보면 이 종이라는 단어의 의미지가 부정적이 아니라 때로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예가 더러 있었습니다. 예컨대, 출애굽기 21장을 보면 모세의 율법가운데 이런 법규가 있었습니다. 어떤 종이 주인을 위해서 6년을 일하고 제 7년이 되면 안식년에 주인은 이 종에게 자유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어떤 종이 주인에게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제가 지나간 6년 동안 살다가 주인님하고 무척 정이 들었습니다. 저는 주인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따라서 저는 앞으로 나가서 자유하지 않고 한평생 주인님을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면 이 주인은 종을 데리고 와서 귀에다가 송곳으로 구멍을 뚫습니다. 멋으로 뚫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영원한 종에 대한 표시입니다. 이 표시를 갖게 되면 그날부터 주인은 그 종을 더 이상 종으로서 취급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아들과 똑같이 대우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런 경우에 우리는 종에 대해서 이런 개념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종’, ‘자유의 종’ 즉, 종은 종인데 자유한 종입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의 자유를 오히려 주인에게 반납하고 스스로 자원해서 종이 된 사람이며 그가 종이 된 동기는 사랑이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 자유를 반납하고 기꺼이 그 주인의 심부름을 하며 한평생 그 주인을 위해서 살기로 결단한 종! 아마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문화 속에도 비숫한 종에 대한 개념이 있습니다. 로마에 있어서도 종이라는 것은 아주 천대를 받고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종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때때로 로마사회 속에서도 매우 달라질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주 지체높은 귀족의 종이 되었을 때, 아니 로마의 종 가운데서 어떤 자유인보다도 어깨를 높이며 프라이드를 가진 종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의 황실에서 심부름을 하는 황제(가이사)의 종들입니다. 나는 가이사의 종이다. 이것은 굉장히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어쩌면 그런 개념들을 인식하면서 오늘 이 본문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로마의 황제의 종이 문제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울은... 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주인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부르심을 받은 이후부터 강렬한 빛 앞에 노출되어 이 빛 앞에 포박된 바울이 자기를 부르던 그 음성의 주인을 향해서 이렇게 소리친 이후, “주여 뉘시오니이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시작한 이후 바울에게서 새로운 신분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종) 바울은!’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이 바울이 가졌던 동일한 고백을 사랑하는 이웃들 앞에 여러분은 고백하실 수가 있습니까. “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동원은”. 1절에 다 같이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고백하기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의 삶이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은 종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 즉, 자아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종의 삶이 불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만약 그 종이 매우 중요한 사명을 위임받은 종일 경우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종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도로 인식합니다. 종은 종인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본래 이 단어의 유래는 황제나 왕으로부터 특수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자를 뜻할 때 이 단어가 써졌습니다.
매우 중요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 왕이 친히 어떤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탁하고 그를 축복하며 떠나보냄을 받은 자가 사도입니다. 오늘날의 개념과 가장 유사한 개념을 생각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대사(Ambassador)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며 그 나라로부터 매우 중요한 임무를 받고 파송을 받은 사람 그래서 사도의 자격은 반드시 자기를 보내신 높으신 분과 알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자격입니다. 김현희가 비행기를 폭파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걸 수가 있었던 것은 친애하는 김정일동지를 만나 사명을 친히 부여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 앞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자격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본 사람이라야 사도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의 사도직이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제자들처럼 살았던 제자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그 주님을 친히 만났다. 다메섹도상에서 나는 그 주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주님이 내게 친히 그 임무를 주었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종종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이 문제가 되는 부분에서 자기변명을 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더냐 내가 그 주님을 친히 보지 못하였더냐’(고전 9:1)고 합니다. 왕 중의 왕이신 그분을 뵙고 그 경험 속에서 자기를 보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울! 그리고 그 Mission을 위하여, 나를 이 놀라운 사명을 위해서 불러주신 그분이 또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 바로 사도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사도로 인식합니까? 좁은 의미로서는 예수님의 12제자 같은 분이 사도이겠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분 앞에 왔습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 왔을 때 우리를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셨는지요. ‘내가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나도 너희들을 보내노라.’ 주님 앞에 나왔을 때 나를 받아 주시고 나를 용납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고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다시 세상으로 나를 보내신 그분, 그런 의미에서 사도로 우리를 불러 주시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여러분은 들으시는지요!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복음의 전령으로 인식합니다. 우리 1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는 임무를 받고 보내심을 받은 자인데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바울의 자기 인식입니다. 복음의 전령!
내가 왕에게 보내심을 받긴 받았는데 아주 나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세상에는 이런 악역을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가 있습니다. 나쁜 소식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저도 그런 역할을 꼭 한번 한 적이 있습니다. 군대에 갔었을 때 저에게 주어진 1차적인 보직이 영현계였습니다. 영현계란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화장해서 처리하여 박스 속에 넣어서 그 집에까지 갖다 주는 일입니다. 이 보직에 떨어졌더니 옆의 사람들이 좋은 보직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시체 태울 때 옆에서 놀기만 하면 되고 갖다 주기만 하면 되니까 아주 좋은 것이라고 축하까지 해 주더라고요. 왜 나에게 이것을 시켰느냐고 물어보니까 서류를 뒤져보다가 전도사를 한 과거가 있어서 이것도 잘하겠다 싶어서 시켰다고 합니다.
서너 사람이 짝이 되어서 가는데 제일 졸병이었던 제가 박스를 붕대처럼 매어서 드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제 일차적 파견을 받아서 경상도 밀양 근처에 갔는데 어떻게 대우를 받았겠습니까. “어떤 놈이 내 아들을 죽였느냐”라고 작대기를 들고 뛰쳐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 박스를 거기다 두고 그냥 도망갔습니다. 그렇게 혼이 나서 한번 갔다와서는 “하나님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되었나요? 바꿔달라”라고 기도하고 상관에게 바꿔달라고 했더니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해서 영어를 곧잘 하니까 거기에 맞는 일을 달라고 했더니 얼마 후에 카츄사에 파견을 받아서 옮겨 가게 되었는데, 저는 그때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악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책임을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런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좋은 소식(Gospel)을 위한 전령으로서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유앙 겔리온)이라는 단어가 맨 처음 쓰인 때가 이런 경우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거기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해방의 명령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자유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이때 처음으로 유앙겔리온이라는 기쁨의 소식, 복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보냄을 받은 우리의 이웃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자유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구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삶이 가능합니다”라고 바로 이런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가 기다리고 있는 최대의 기쁜 소식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묻고 있는 가장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의 일평생의 삶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어떻게 삶을 살 수가 있는가?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자가 필요합니다.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이 복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2절 말씀을 보시면,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은 새 소식은 아닙니다. 이 복음은 전에부터 있었던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예고하셨고 약속된 소식인 것입니다-“어느 날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사람들의 죄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생명을 맛볼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기쁜 소식이 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 역할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을 아주 잘 알아야 하고 사람의 사정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라고 합니까. 3절에 보시면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참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인간이십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4절에 보시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4절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참 사람이시며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만나면 제일 괴로운 질문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하나님이냐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입니다. 질문을 바꿔보면 사람의 아들도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이신가? 의 정답은 그는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라고 말합니다.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사람이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를 부인하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모든 이단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든지 아니면 인성을 부인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사정을 얼마나 잘 아실까요. 또한 그는 참으로 사람으로 오셨으니까 사람의 사정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중보자, 화해자가 될 수 있으신 유일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 때문에 인간을 진노할 수밖에 없으셨던 하나님이 그 인간을 향하여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자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인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화해를 위하여 그리고 인간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변하기 위하여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복음의 전령자로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 인식에 근거하여 자기의 역할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또한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그리고 주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저와 여러분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이것을 우리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서 복음을 위해 보내셨다고 믿고, 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령으로 살기를 그분이 기대하신다면 우리가 해야 할 그 사역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 사역입니다.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분류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종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낮은 사람 높은 사람, 무식한 사람 유식한 사람, 별 볼 일 없는 사람 별 볼 일 있는 사람,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우리는 두 가지로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입니다. 결국 우리의 사역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나는 신자와 불신자를 어떤 태도로 근접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두 가지로 규정할 수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 만날 때, 격려하여 그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고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에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는 일평생, 바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된 삶의 모습임을 오늘의 말씀 앞에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믿는 자, 신자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1절을 읽어보시면,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즉, 그는 “나는 로마에 있는 당신들을 만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여러분들을 섬김으로써 여러분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믿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 사람의 신앙이 성숙하고 강화되고 있습니까?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신앙이 성숙지 못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교회와 특별히 목사에 대한 발언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대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같이 만나서 한바탕 교회를 욕하고 목사를 욕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여러분 주위의 분들이 어떤 영향을 받겠습니까. 여러분, 교회에 대한 혹은 우리의 영적 지도자에 대한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자녀들 앞에서의 우리의 발언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컷 교회와 목사를 욕해놓고 다음 주일에 왜 교회에 안 가냐고 하면 자녀들이 가겠습니까? 무슨 영향을 받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그의 신앙이 자라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그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그의 신앙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바울은 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떻게 했습니까. 9절에 보시면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을 자기의 이웃으로 인식하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도의 교제의 시작은 먼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돕기를 원한다면 그들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로마에 있는 당신들을 내 마음에 품고 먼저 기도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의 시작은, 생각나는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은 10절에 보시면 그가 위해서 기도하고 있던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기 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기 위해서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만큼 바울은 기도했던 그들을 만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사람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아주 논리적인 전개의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만 읽고 나면 바울에 대한 인상을 아주 차갑고 논리적이고 아주 냉철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구절을 보면 바울이 꼭 그런 사람만 같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제 TV를 보니까 한국에 와서 새로 배운 말인데 알부남-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이라고 하는 단어를 들었는데 바울도 그런 알부남인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설교할 때 소리를 많이 지르니까 저보고 무섭다고 하는데 저도 알고 보면 아주 부드러운 알부남입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가 어떻게 저 사람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기도했으며, 또 그들을 만나서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울도 그들을 통해서 또한 도움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12절에 보세요.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말씀으로 도울 수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저를 도울 수가 있습니다.
저는 20년 목회의 연륜이 지나가면서 짧다면 짧은 목회기간이었지만 목회를 하다 보면 많은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내 부족함 때문에 때로는 나의 잘못과 상관없이 오해를 받기도 하고, 목회를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이런 사람을 ‘나의 아리스다고’라고 부럽니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아리스다고란 인물에 대해 가끔씩 언급을 합니다. 이 사람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아리스다고란 사람은 언제나 바울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항상 말없이 곁에 서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때면 항상 등장하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던 그 이유도 항상 마음이 외롭고 지치고 낙심이 될 때마다 조용히 와서 “목사님, 기도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라고 격려해 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모르지만 이 사람은 저의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어떻게 저 사람을 세울 수가 있을까를 생각하며 서로서로 세우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도로, 전령으로 바울은 믿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저와 여러분의 소원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우리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14절에 바울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바울은 스스로를 복음의 빚진 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야만인에게도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혹은 유식한 자가 무식한 자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에 대한 최대의 편견은 부자의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게 선교할 수가 있다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1세기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유대와 로마를 비교해 보세요. 유대는 로마에 의해서 정복을 당했습니다. 힘으로 말하자면 로마가 강자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했다면 로마의 강자, 자기들을 정복한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 당시 로마가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에 아직도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문화는 그리스문화였습니다. 희랍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대표였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은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보세요. 나는 이 복음에 빚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 16절에 보시면 내가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직장의 상관 앞에서 이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시지는 않습니까. 많이 배운 사람들 앞에서 기가 죽어서 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없나요? 그러나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의 자랑과 영광은 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권력을 가지고 세계의 도로망을 설치하여 세계를 통하게 만들었습니다. 로마는 그 힘을 가지고 알려진 모든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하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로마는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로마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무력합니다. 희랍인의 찬란한 문화는 세계의 지성을 제공했지만 희랍의 지성으로도 인간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만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복음만이 내 사랑하는 이웃이 누구이건- 그들이 내가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는 나보다 높은 사람이든, 나보다 많이 배운 사람이든 상관없이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인간,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방황하고 고독하며, 인생의 영원한 운명을 알지 못하고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으로 내 이웃들을 바라보며 능력인 복음을 가지고 이웃들을 접근하고 계신지요!
복음은 인간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17절에 보시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복음은 죄용서와 구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또 하나 구원의 적극적인 측면으로 복음은 인간을 의롭게 만듭니다. 인간이 어떻게 의로워질 수가 있는가? 우리는 모두가 다 의를 열망합니다. 노력을 해 보았습니다. 결심을 해 보았지만 작심 3일이었습니다. 도덕이 나를 의롭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경험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하며 무엇이 의로운 삶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그 많은 율법에 통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이 바울을 의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나요?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예수 앞에 왔더니 예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그 의를 선물로 주십니다. 내 양심의 가책에서 나를 해방하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나를 의롭다 하신 그날부터 그 의로움을 향한 열망을 내 속에 주시고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복음! 누가 우리에게 이런 변화를 제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본문에서 아주 좋아하지 않는 번역은 15절에 ‘할 수 있는 대로’라는 말입니다. 이 번역은 마치 할 수 없을 때는 못하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영어번역을 봐도 “I'm eager 혹은 I'm ready” 즉, “최선을 다하여”라는 뜻입니다. 나는 준비된 상태로 이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 모든 상황, 모든 사람, 모든 대상 속에 저들을 바꿀 수 있는 저들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도상에서 믿는 사람 만나면 격려하고 도와줘서 우리 주님 사랑하도록 만들고, 내 인생의 도상에서 오늘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가 누구이든, 내가 그 사람보다 얼마나 못 배웠거나, 지위가 낮거나 상관없이 복음이 없어서 외롭고 복음이 없어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은 사람들, 복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들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이 당신의 구원자가 되십니다”라는 이 복음을 전하도록 나를 불러 주시고 보내주시는 주님,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도로 보내심을 받아서 오늘도 복음의 전령으로 내게 주어진 삶의 길을 살기를 원합니다”라는 이 고백이 우리 자신들의 역할이요, 우리 자신의 인식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고난주간 주일설교] 두 강도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마 27: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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