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부활절예배 강해설교말씀] 심은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1~18)

기혼샘 2021. 8. 7.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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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부활절 예배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농부는 봄에 열심히 씨를 뿌려 가을에 추수하게 됩니다. 우리도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려서 때가 되매 영적인 추수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의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도 없습니다. 이 시간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영적 추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제목: “심은 대로 거두리라” (갈 6장)

Whatsoever a man soweth, that shall he also reap.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갈라디아서 6:1~18

 

요절: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또한 그것을 거두리라.” (갈 6:7)

주제: 하나님의 영 안에서 심은 대로 거두게 되니 의, 평화, 기쁨을 심자

 

4월의 계절은 아름답습니다. 황금의 계절입니다. 예년보다 올해는 일찍 봄이 왔고, 5월의 신록이 보름 앞당겨진 느낌입니다. 파아란 연두색 새순들이 나뭇가지마다 오르고 신록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박목월(1916~1978, 대구 계성고 졸업) 시인은 “4월의 노래”에서(작곡: 김순애)

1.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이 어린 무지개 계절아

2.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이 어린 무지개 계절아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네 번 나타나셨습니다. 엠마오에서 돌아온 글로바가 참석한 모임, 도마가 참석한 모임, 갈릴리에서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을 때 해변가에서, 그리고 승천하실 때 500여 문도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나타나신 일을 요 20:24-29에서 읽어보겠습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디두모(아람어로 “쌍둥이 twin”라는 뜻) 하는 도마(Thomas)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탁대로 에뎃사(Edessa Έδεσσα “물의 마음” 뜻, 현재 이란의 산느우르파Urfa)에서 온 관리들(요 12:20-28)과 함께 에뎃사(고대 아르메니아의 수도, 하란 북쪽 40km)에 가서 그 왕을 위해 기도를 해주는 일로 불참했다고 하는 설명도 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아르메니아 왕을 고쳐준 대가로 도마에게 동방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선교센터로 제공했다고 합니다. 에뎃사는 동방 기독교의 선교센터(도마의 한국, 인도까지 복음전파)가 되었고, 평행으로 서쪽 2시간 거리에 위치한 시리아 안디옥(Antioch in Syria)은 서방 기독교의 선교센터(바울과 바나바의 로마, 스페인까지 복음전파)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곳에 네스토리우스(경교) 박물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이 여행에서 돌아온 도마에게 이르되,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노라,” 하였으나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분의 두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분 옆구리에 넣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여드레가 지나서(주님 부활하신 지 8일 후인 월요일 밤) 제자들이 다시 모여 있을 때에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에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시니 도마가 응답하기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요 20:28)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도마가 순교했다는 인도 첸나이 기념교회당 이름이 “주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 찬송 135장(통 133장) 3절에 보니,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주시고 사랑하는 그의 제자 가슴에 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품어주셨네. 어제께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한결같은 주 예수께 찬양합니다. 세상 지나고 변할지라도 영원하신 주 예수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땅끝까지 이르러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대로 가장 먼 땅끝인 아시아의 동쪽 끝인 한국에 도마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서쪽의 땅끝인 스페인까지는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장인 6장을 강해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자가 된 성도의 생활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선행을

 

1. 서로의 짐을 지라(갈 6:1-10)

 

1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2 너희는 서로 남의 짐들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기 때문이라. 4 오직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입증할지니라. 그리하면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만 기쁨을 누리리니 5 이는 각 사람이 자기 짐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 6 말씀 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나눌지니라. 7 속지 말라. 하나님께서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또한 그것을 거두기 때문이라 8 이는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기 때문이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집안에 속한 자들에게 할지니라.

 

1절.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영의 이끌리심을 받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범죄자에 대해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하여 교훈합니다. 성도가 범죄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도는 범죄자를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충고해야 하고 또 필요하다면 책망도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규모 없는 자들 [무질서한 자들]을 권계 하라”라고 가르칩니다(살전 5:14).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라고 권면합니다(히 3:13). 그러나 1절은 범죄자를 충고하고 바로 잡되 교만하거나 거친 마음으로가 아니고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딤후 2:25에서도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또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는 말은 “너도 시험을 받지 않도록”이라는 뜻입니다. 성도 각자가 시험을 받지 않고 범죄치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 각자의 성화가 중요합니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것은 죄 안 짓는 거룩한 삶입니다. 성도에게 성화가 중요한 까닭은 그가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마 5:16)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며(벧전 2:9) 또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벧전 3:1).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설교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기도의 문이 막히고 마음의 기쁨과 평안과 힘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살전 4:3). 성도의 삶의 첫 번째 목표는 죄 안 짓는 것입니다.

 

2절. “너희가 짐들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Bear ye one another's burdens, and so fulfil the law of Christ.”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여러 짐들을 서로 지라는 것은 남의 드러난 죄들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그런 다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죄의 용서를 뜻합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의 결점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서로 사랑하려면 서로의 결점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도가 짐을 서로 질 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절. 우리는 짐을 서로 져야 할 이유는 우리가 남의 드러난 실수와 범죄를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고 고상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똑같이 부족한 사람이며, 어느 날 우리 자신도 다른 이의 죄와 비슷한 죄를 범할지도 모릅니다.

 

4-5절. 성도는 자기를 크게 여기지 말고 각각 자기 일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자랑할 것이 자기 안에서만 있고 남과의 관계에서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부족을 알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 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나눌지니라.” ‘모든 좋은 것’은 현세적인 모든 좋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은 귀하고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것의 가치를 안다면, 육적인 것을 함께 나누기를 아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 봉사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후한 공급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려져 레위 지파 사람들의 생활비로 주어졌습니다. 한편, 제사장들의 수는 레위인들의 수의 10분의 1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레위 지파가 받은 십일조의 10분의 1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십일조 외에도 백성들의 제물들의 일부분을 그들의 몫으로 받았습니다(민 18:12, 29). 이와 같이,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레위 지파 사람들과 제사장들 곧 성전 봉사의 일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윤택함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운영의 한 원리를 보입니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가 없지만, 복음 사역과 교회의 일에 전무(專務)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가 구약의 십일조 정신으로 교역자들과 교회 직원들에게 물질적으로 공급한다면, 목사들은 성경 연구, 독서, 설교 준비, 심방 등 주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고, 목사 후보생들은 충실한 신학 교육과 목회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교회 직원들은 교회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 유여함이 교회 봉사자들을 해이하고 불성실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그들 간의 문제입니다. 성도들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십일조 제도에서 보여주신 정신을 따라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후하게 공급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7절. “속지 말라 Be not deceived. 하나님께서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또한 그것을 거두기 때문이라” ‘속지 말라’는 아마 마귀에게나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에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는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God is not mocked’는 뜻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대접하는 것은 그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받으실 만한 분이십니다. ] 바울은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근거로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심은 것을 거두는 것은 자연계나 영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삼상 2:3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에게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마 7:12).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8절. ‘자기 육신에게 심는 것’은 육체의 죄성에 이끌려 행하는 행위들을 말합니다. 그런 행위들의 결과는 썩는 것 곧 멸망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위해 심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열매를 맺는 행위로 영생에 이릅니다. 이것은 사람이 이런 일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는 자는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한 일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 전도하고 선을 행하는 것 등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영생 얻는 자들의 표요 장차 영생에 들어갈 자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일들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 선을 행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 구원의 열매입니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목표입니다. 딛 2:14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기 쉽습니다. 남이 그를 몰라주고 또 때로는 오히려 그를 비난할 때, 또는 좋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을 때, 낙심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좋은 결과를 볼 것이며, 또 최종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결과를 볼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오는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습니다.

 

10절. 선행의 대상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좋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행 2:44-45는 증거하기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하였습니다. 또 행 4:32는 증거하기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상적인 공동체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갈 6:1-10절까지 주는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합니다. 첫째로, 성도는 범죄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성도는 자신이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죄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로, 성도는 남의 결점에 대해 관용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과 용서의 심정입니다. 넷째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영생에 이르는 자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여섯째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행은 구원받은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일곱째로,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십자가만 자랑하자(갈 6:11-18)

 

11 너희는 내가 내 손으로 너희에게 얼마나 큰 글자로 썼는지 보는도다. 12 육신으로 잘 보이고자 하는 자들이 너희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함은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받지 아니하려 함이니라. 13 할례 받은 자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다만 너희의 육신을 자랑하려고 너희가 할례 받기를 원하느니라. 14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새로운 창조물만 있기 때문이라. 16 이 규칙에 따라 걷는 자들에게 또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원하노라. 17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는 내가 내 몸에 주 예수님의 자국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영과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1절. 바울은 눈이 그리 좋지 않아 서신을 대필(代書)하게 했습니다. 로마서는 더디오(Tertius)가 대필했습니다(롬 16:22).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의 비서 역할을 한 브로고로(Prochorus)가 대필했다고 합니다(행 6:5).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직접 로마에서 쓴 서신입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이 본 서신을 친히 쓸 때 큰 글자로 쓴 것은 아마 그의 눈이 나빠서이었을 것입니다.

 

12절. “육신으로 잘 보이고자 하는 자들이 너희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함은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받지 아니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교회 안에는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교사들뿐 아니라, 단지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억지로 할례 받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리에 대한 어떤 신념 때문에가 아니고,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면하려 함뿐입니다. 그들은 핍박을 피하려고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진리를 저버렸던 것입니다.

 

13절.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창 17:7-17)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언약의 내용인 율법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같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이미 받은 자들도 실상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육체로 자랑하려고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14절.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에게는 할례가 아무 의미가 없었고 비본질 문제일 뿐입니다. 그에게는 할례 받은 육체가 아무런 자랑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그의 자랑거리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가 복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세상의 것들이 그에게 크게 생각되었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없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바울은 동역자 없이 혼자 아테네에 가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행 17:16-34). 그는 만신전(萬神殿 Pantheon) 파르테논에서 우상숭배를 보고 분개하여 하나님에 대한 변론을 하다가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에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아니했습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작심을 하고 십자가만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그토록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자랑거리인가요? 그것은 대속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대속(代贖)이란, 주님께서 나의 죗값과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해 주신 일입니다. 주님의 대속이 없었다면 나는 죄악 된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 된 세상에 속했던 과거의 나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끝났고 새로운 내가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과거의 나, 곧 죄악 되었던 나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 세상의 그 무엇도 이제는 성도에게 자랑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15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새로운 창조물만 있기 때문이라.”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할례는 비본질 문제(아디아포라 a-diaphora = “no matter”)입니다.(고전 7:19, 갈 5:6). 중요한 것은 “새로운 창조물 a new creature”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고후 5:17) 이것이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할례는 아무 효력이나 유익이 없습니다. 할례는 율법 준수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줄 뿐이며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무 할례가 유익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방인들의 할례 없음은 그들이 본래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으며 소망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입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새 자아(自我)를 말합니다]. 그것은 새 생명을 얻은 자요 새 성향을 받은 자입니다. 구원받은 영혼의 새 성향은 지식과 의와 거룩만을 향한 성향이며 범죄치 아니하며 범죄할 수도 없는 성향입니다. 성도의 거룩하고 의로운 삶은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16절. “이 규칙에 따라 걷는 자들에게 또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원하노라.” ‘규칙’이라는 원어(카논 kanon)는 ‘원칙’ ‘규범’입니다. ‘이 규칙을 행하는 자’라는 원어는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규칙’은 은혜의 복음 진리를 말합니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안에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가 있고,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자’는 복음 신앙을 가진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17-18절. 바울을 괴롭게 한 것은 그의 사도직과 권위를 부정하고 그의 전한 복음을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도전 때문에 이 서신(epistle)을 쓰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괴롭게 말아야 할 이유는 그가 그 몸에 예수님의 흔적(stigmata)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흔적’이란 채찍 자국이나 못 자국같이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의 흔적을 가리킵니다. 앗시시의 프란시스(San Francesco d'Assisi, 1182~1226)도 손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고.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합시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말씀대로 우리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여 도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란 신앙 고백하며 주님만 따라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일부터 고린도 전서, 후서를 강해합니다.

 

찬송 407장(통 465장)

 

(1)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후렴.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2) 맘 속에 시험을 받을 때와 무거운 근심이 있을 때에

주께서 그때도 같이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3)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때도 같이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4) 낸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 고칠 병이 아주 없네

괴로운 날이나 기쁜 때나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네

 

[오늘의 기도]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복음을 통해 저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피밖에는 없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 되게 하시며 우리의 감사의 내용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후의 부활을 바라보며, 재림을 기다리며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게 하옵소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가복음 1장 헬라어 성경말씀] 메뚜기와 석청 먹은 세례 요한(막 1:4-8)

 

[마가복음 1장 헬라어 성경말씀] 메뚜기와 석청 먹은 세례요한(막1:4-8)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가복음 1장 헬라어 성경말씀 중에서 메뚜기와 석청 먹은 세례 요한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복음을 선포하면서 메뚜기와 석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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