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성경공부 자료

[기독교 교회사 인물] 모니카를 통한 어거스틴의 생애와 회심

기혼샘 2022. 11. 1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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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회사를 통해서 우리가 기독 교회사의 인물들을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서 어거스틴이 어떻게 인생을 살았으며 하나님을 만났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빠져 있다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회심했다.

 

어거스틴의 생애와 회심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e A.D 354 - 430 )은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Numidia )의 타가스테( Tagaste )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제롬보다 9년 후의 일이었으며, 암브로시우스보다 14년 후의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트리키우스( Patricius )는 타가스테에 사는 가난한 한 시민으로 본래 성격이 대단히 친절하지만 성질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르는 난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년에 가서야 믿었는데 그전에 아내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방해하지 않았던 종교에 대하여 관대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는 어거스틴의 나이 17세 때에 세상을 떠났는데 말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주님을 영접한 후에는 과거의 불경건한 생활을 끊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Monica )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독교사에 있어서 칭찬받는 어머니 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경건하고, 고상하며,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자식에 대한 신앙의 열의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의 그의 책 고백록에서 모니카는 자식에게 존경을 받으며, 남편에게는 주를 섬기듯이 섬기는 착한 아내였고, 행동으로 참 그리스도인의 표상을 드러내었기에 남편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흠모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파트리키우스의 성격을 잘 아는 이웃 여인들은 모니카가 맞았거나, 가정의 싸움이 하루를 넘기는 일이 없음을 보고 경의를 금치 못하였다. 모니카는 시어머니에 대해서도 인내와 온유함을 가지고 섬겼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좋은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모니카의 가장 큰 은사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거나 불화할 때 힘이 미치는 한 화평케 하는 평화의 사람이었다. 이런 모니카의 삶의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 일에 있어서 모니카는 남편을 이기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부모 밑에서 21녀 중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유아기의 시절은 다른 아이들을 관찰함으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 당신의 종 내가 어디서나 언제나 죄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 즉 어거스틴은 자신의 유아기 역시 죄인이었음을 고백한다.

어거스틴의 소년 시절은 경건한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을 받은 시기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이해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을 배워 알았다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년이었지만 자신이 학교에서 매를 맞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린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던 사건이 자신에게는 매우 심한 마음의 고통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소년 시절에 학교에서 매를 맞는 것을 두려워하였지만 주어진 과제를 항상 태만히 한 학생이었다. 어거스틴은 학습에 있어서 희랍어는 매우 싫어하였지만 라틴어는 좋아하여 학교에서 초등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 이외에 이름 있는 문법 학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좋아할 정도로 잘하였으며, 그의 웅변술 역시 뛰어났다. 어거스틴은 소년 시절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세례를 갈망하였는데 그의 배 아픈 병이 일찍 낫았으므로 그의 세례는 훗날로 연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세례가 연기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였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만일 더 오래 살면 더 더럽혀질 것이 불가피하며, 또 세례 받은 후의 죄짓는 것은 더 크고 위험하기에 하나님의 섭리로 연기되었다고 고백한다. 소년 시절의 어거스틴은 자신이 싫을 정도로 거짓말을 잘하였고, 가정의 것을 좀 도적질 하는 소년이기도 하였다. 어거스틴의 좀 도적질의 이유는 무엇이 먹고 싶어 했기 때문일 때도 있었지만 다른 아이에게 무엇을 주어서 놀이에서 이기려고 그러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어거스틴은 어릴 적부터 강한 승부욕이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거스틴의 청년기는 그의 말대로 3가지의 특징을 지닌 시기였다. 첫째로, 세상적인 것에 만족하려는 욕망으로 불타 있었고, 둘째로, 여러 가지 허망한 사랑을 추구하였으며, 셋째로,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보이려고 애쓰는 소년이었다. 그는 소년기에 친구들로부터 찬사를 받기 위해 그들보다 더 못된 짓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때에 배 도적질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배가 고프거나 궁핍해서가 아니라 착한 일을 무시하고 싶은 마음과,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그리고 나쁜 짓 그 자체를 사랑해서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카르타고 유학 시절에는 육적인 사랑을 즐기는 자가 되어 나는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쾌락의 극치를 경험하기까지 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이때 연극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욕정의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슬퍼하기를 좋아하여 자신을 슬프게 해주는 것들을 찾아 헤매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때 그는 수사학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뒤엎는 자들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었다. 또한 19세 때 학교의 공부를 밟아가는 과정 속에서 키케로(Marcus T.Cicero)로가 쓴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불멸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이 시절에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그의 표현을 빌면 그들은 미친 듯이 교만한 자들이었고, 육적인 것을 너무 따랐던 자들이며,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카르타고에서 10년 이상 동안 동거 생활을 하게 되는 한 여인을 만나 살게 된다. 통설에 따르면 그녀는 “컹크베인”이었는데 이는 이라는 뜻이었다. 그때 어거스틴이 결혼하여 따로 둔 첩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분이 낮은 여인이었기에 사회적으로 요인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아데오다투스(Adeodatus) 역시 사생아가 되었다.

이때에 어거스틴은 점성술에 매혹을 느껴 그들과 의논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때 그는 그 지방의 총독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데 그는 대단히 현명한 사람으로 전에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점성술을 철저히 공부하였지만 속이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버렸다고 이야기하면서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그 책을 버리라고 권하였다.

어거스틴은 375년 고향으로 돌아가 수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함께 자란 사람과 아주 친하게 지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통하여, 허구한 이야기나 미신에 빠져들게 되었다가, 심한 열병으로 오랫동안 죽은 듯이 땀을 흘리며 누워있었는데 그가 의식을 잃고 있는 중에 세례를 받았다. 그 친구가 회복된 후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이 농담을 하자 그 친구는 정색하고 자신의 친구가 되려거든 그와 같은 농담은 하지 말라고 하였고 며칠 후 재발하여 세상을 떠났다. 친구의 죽음은 어거스틴에게 커다란 슬픔을 주었고 그로 인하여 슬픔을 잊고자 타가스테의 마을을 떠나 카르타고에 갔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처음으로 책을 썼는데 그것은 아름다움과 적절함(Pulchro et apto)이었다. 이 책을 로마시의 웅변가인 히에리우스에게 바쳤는데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심히 찬양하였기 때문이며, 자신의 연구열이 저 유명한 웅변가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책은 어거스틴 당시에도 잃어버려 없었다.

어거스틴은 20세 때에 모든 학예에 통달한, 학문에 특히 재능을 가진 청년이었다. 당시에 학예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수, 기하학, 음악, 천문학이었는데 어거스틴은 이러한 책들을 모조리 다 읽고 누구의 도움 없이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학문의 재능은 대단히 빨라 문제에 얽힌 책들을 어느 스승의 도움 없이 풀었다.

그의 나이 29세 때에 마니교의 유명한 감독 파우스투스가 카르다고에 왔었기 때문에 일식과 월식의 날과 시간과 그 범위에 대하여 마니교가 다른 이유 등에 관하여 물어보았으나 실망만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말솜씨가 구수하여 퍽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의 내용에 있어서는 다른 마니교들이 말한 것과 별 다름이 없었고 다만 그들보다 말은 더 잘하고 재미있게 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383년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갔다. 그가 로마에 간 이유는 친구의 좋은 보수와 높은 자리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카르타고 학생들보다 그곳 학생들이 더 조용히 공부하고 엄격한 규율 밑에서 통제되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도 아직 마니교를 못 떠났는데 그러나 마니교에 대하여 옹호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노골적으로 설득하여 믿지 말라고 하였다(특히 로마의 하숙집 주인에게 그러하였다). 또한 이때 교회에서 진리를 찾는 희망을 버렸는데 그 이유는 신이 인간의 육체의 형상을 갖고 있고 육체의 지체의 윤곽에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서의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그 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거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그 후 밀라노의 도시로부터 로마 시장에서 수사학 교사 하나를 선발하여 국비로 밀라노에 보내 달라는 요청이 왔는데 이때 어거스틴은 마니교 사람을 통하여 지원하여 밀라노에 갔는데 그는 이때부터 영원히 마니교를 떠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암브로시우스 ( Ambrosius )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어거스틴을 친절하게 대하여 주었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의 내용보다는 그의 설교의 형식에 관심을 두고 설교를 듣기 시작하다가 점차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합리적인 근거하에 옹호될 수 있다고 보게 되었다. 이때 밀라노에 모니카가 찾아왔는데 그녀는 그곳에서도 신앙의 열심을 내었다. 교회에 나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었으며, 어거스틴이 하루빨리 구원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고, 구제에도 힘썼다. 그녀는 어거스틴의 구원을 위해서 암브로시우스를 천사같이 극진히 대접하였으며, 또한 발렌티니아누스(Valentinianus) 황제의 어머니 유스티나( Justina )가 아리안파의 기독교인들의 꾐에 빠져 암브로시우스를 박해하였는데 이때 모니카가 교회를 사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결혼의 압력에 의해서 어떤 여자와 약혼을 하게 되었다.  일은 모니카의 노력으로 성사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지금까지 동거하던 여인은 어거스틴의 결혼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는데 그때 그녀는 다시는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하고 떠나갔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결혼하기까지의 2년의 기간이 걸려서 한 여자를 얻게 되는데 이 일은 어거스틴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오점이 되는 사건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주로 프로티누스( Plotinus )의 작품을 많이 읽었다. 이 철학은 마니교의 물질주의와 그리고 회의주의에서 벗어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밀라노에서 빅토리누스( Victorinus )로부터 얻은 바가 매우 컸다. 빅토리누스는 신플라톤학파의 유명 인사였는데 그가 말년에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어거스틴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밀라노에서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감화를 받은 것 외에도 바울의 서신을 연구하면서 성서의 진리를 깨닫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안토니우스의 전기로 인하여 점점 더 진리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다. 빅비토리누스의 이야기와 폰티키아누스를 통하여 황제를 수행하던 두 명의 관리가 복음을 받아들여 관직과 결혼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아서 자기 성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라노의 하숙집 정원에서 그의 표현대로 하면 나의 깊은 생각이 나의 영혼의 심연을 파헤치고 나의 모든 비참을 찾아내어 마음의 눈앞에 쌓아놓을 때 눈물의 홍수를 동반한 큰 폭풍이 내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이 이같이 통회의 눈물을 흘릴 때 이웃집에서 어린이의 말이 들렸는데 그것은 들고 읽으라, 들고 읽으라 ( Tole lege, Tole lege)"라는 말이었다. 어거스틴은 이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성경을 찾아 읽었는데 그곳은 바로 로마서 1313-14절이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였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하여 회심을 하게 되었다. 회심은 386년 늦은 여름 경이었다. 그는 회심 후에 새로운 삶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자 하여 밀라노 근방에 있는 카씨시아쿰( Cassisiacum )에 있는 친구의 별장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는 이때 수사학 교사를 포도 수확기 방학을 이용하여 그만두었다. 어거스틴은 이곳에서 회의론 반박론 ( Contra Academicos )등 여러 책들을 저술하였다. 또한 어거스틴은 이곳에서 암브로시우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세례 받기 전 준비하기 위하여 어떤 책을 읽으면 좋으냐고 물었고 암브로시우스는 어거스틴에게 이사야서를 권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사야서가 매우 어려워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세례를 준비하였고 마침내 387년 사순절 초에 밀라노에 돌아와 제자이자 친구인 알피우스와 아들과 함께 암브로시우스 감독으로부터 부활절 전날 밤에 역사적인 세례를 받았는데 이때 어거스틴은 너무나 감격하여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 일을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세례를 받고 나니 우리들의 과거 생활에 대한 괴로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어거스틴은 일행과 어머니와 함께 고향에 가기 위해 로마의 항구 오스티아(Ostia)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서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당하게 된다. 이때 모니카는 56세였고, 어거스틴은 33세였다. 그때 어거스틴은 바로 아프리카로 가지 않고 1년간 로마에 머물면서 자유의지론(De libro aritrio)등 몇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388년 고향인 타가스테에 가서 재산을 팔아 구제하였고, 살던 집은 개조하여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그는 391년 수도원 문제로 힙포(Hippo)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게 앞으로 끌려 나와 발레리우스에게서 사제로 안수를 받는다. 그는 여러 논쟁으로 점점 유명해지자 다른 지역의 감독으로 어거스틴을 빼앗길까 봐 발레리우스는 서둘러 어거스틴을 힙포의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발레리우스 감독은 그 후 얼마 있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여러 논쟁을 통하여 교회를 변론하였고 감독의 직분에 충성스럽게 봉사하다가 4305월 반달족이 힙포를 포위하고 해안과 도로를 봉쇄하였는데 반달족이 포위한 지 3개월 후 어거스틴은 열병으로 앓아눕게 되었고 다윗이 참회할 때 쓴 시편을 외우면서 참회의 눈물 속에 43082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생애를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그의 사상 배경에 깔린 요소를 8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교 전통과 연결시켜준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또한 폴 틸리히는 모든 교회 교부들의 위대성이 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둘째로, 키케로(Cicero)의 저서Hortensius를 연구함으로써 그는 내적으로 진리탐구에 대한 자극을 받았다. 어거스틴은 또한 키케로부터 절충적, 실용적인 시점(視點)을 배워 지상의 나라와 신의 나라를 탐구하였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어거스틴은 마니교로부터 진리란 단순히 이론적인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로 실천적, 실존적 관심사였으며, 진리는 구원의 진리를 의미했으며, 또한 진리란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의 싸움에서 나타난다고 하는 마니교적 사상을 배웠다. 즉 이와 같은 것은 역사를 해석하는 가능성을 부여하는시점을 어거스틴에게 제공하였다.

넷째로,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떠나 회의주의(Skepticism)에 빠졌다. 이 회의주의는 그리스도교의 계시 사상을 받아들일 준비로서, 소극적이었지만 그 전제가 되었다. 또한 회의주의는 계시의 이론을 위해 그 바탕이 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새로운 인식론(New Epistemology) 도 얻게 되었다.

다섯째로, 어거스틴은 회의주의를 신플라톤주의로 극복하였다.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에게 새로운 확실성 곧 혼의 내부에 있는 신의 직접적 확실성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신과 세계의 관계를 해석하는데 필요한 바탕을 제공하였고, 이 철학은 어거스틴에게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심리학적 통로를 가르쳐 주었다.

여섯째로, 또한 어거스틴은 회의주의를 교회의 도움을 통하여 극복하였다. 그것은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영향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일곱째로, 어거스틴은 수도자나 성자들이 실천하고 있었던 그리스도교적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여덟째로, 지금까지 요소에 하나가 결여되어 있는데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다. 그러나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거스틴에게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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