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누가복음 18장 하나님 말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 18:9-14)

기혼샘 2020. 10. 3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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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8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라는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바리새인의 기도인지 세리의 기도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 18:9-14)

 

설교 내용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간혹 우리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우리가 행한 선한 일들을 세어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적 교만이 싹터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약간 선한 것을 자랑하곤 합니다. 이것은 진정의 의미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구원함으로 받은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고, 의를 행하여도 "당연히 행할 일을 행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의를 행하는 것이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종종 잘못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내용이 두 사람의 기도에 관한 것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대개 이 비유를 기도에 관한 교훈으로 이해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가 기도에 관한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구원)에 관한 교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란 어떤 진리를 쉽고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들을 사용하여 진리를 전달하는 문학 방법입니다. 이 비유를 연구할 때는 항상 중요한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항상 그 비유가 놓여 있는 문맥에서 어떤 동기에서 이 비유를 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비유의 내용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비유의 결론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를 연구하면서 이 세 가지의 내용, 즉 비유의 동기, 내용, 결론을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비유의 동기

 

예수님께서 어떤 동기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동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누구에게" 이 비유의 말씀을 주셨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먼저 9절을 보십시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이 비유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특히 이 비유의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분명한 실마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표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으로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 내려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주신 후에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라고 하시지 않고,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의롭다 하심"은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稱義)라고 하는데 하나님 나라나 구원이라는 말과 같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칭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적인 특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3문에 의롭다 하심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의 행위로써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옳게 여겨 받아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를 읽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만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고 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신분이 된다는 것은 참 중요하며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여기에 칭의 교리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의 교리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동기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의 문제"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2. 비유의 내용

 

예수님께서 비유로 예를 드신 두 종류의 사람은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같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기도는 성전에서 이루어졌고, 또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는 방법에 의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기도로 하나님께 나온다는 것은 구약시대의 예배 방법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 기쁘게 할 것"(사56:7)이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서 성전이 기도하는 곳이라는 사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성전이라고 하는 특별한 장소에서 동물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구약적인 배경을 전제로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사람이 동일하게 성전에 올라와서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바리새인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였고,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우리가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의해 가장 많이 책망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바리새인이 다 책망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고 율법이 미세한 부분까지 지키기 위해 힘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으로 위하여 분리되었다는 파라스(???)라는 말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성경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그중에 사도 바울도 니고데모도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다시 점령 국가인 로마 정부를 위하여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많은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유대인들 가운데 세금을 받는 세리로 고용하였습니다.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창기 집단과 함께 이방인과 죄인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대조는 어떤 극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있고, 강한 이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존경받았고 사회 지도계층에 있었던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그의 외적인 생활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강도 같은 짓이나 불의를 행하지 않았고, 또한 간음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종교적인 활동 역시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합니다.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일 년에 단 한 번의 금식일이 대속죄일에 하도록 지정되어 있었습니다(레16:29-31). 그리고 율법이 명한 대로 소득의 십일조를 잘 드렸습니다(레27:30). 외적으로 드러난 사회생활이나 종교생활은 정말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리고 한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일에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는 중에 세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 속으로 세리를 끌어넣으면서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반해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눅18:13) 이 비유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라는 사람의 신분의 대조와 삶의 대조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이 비유의 교훈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누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기도의 태도를 보시고 누구를 의롭다고 하였습니까? 주님께서는 세리가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리새인의 기도의 태도에 있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지만 그 이후에는 계속하여 자신에 대하여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수단적으로만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의식이 없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평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자기가 한 일이 상대적으로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를 들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한 가지가 항상 자신은 의롭고 다른 사람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경우는 그러한 인간의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강도 같은 짓이나 불의를 행하거나 간음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위하여 금식도 해야 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행동이 곧 구원을 받은 사람임을 증명해 주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고 종교적인 의무를 다했다고 할지라도,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도덕적으로 살았다고 할지라도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을까요?

 

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강도 같은 짓은 아니하였고,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였고, 소득의 십일조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자기의 행한 일들만 열거하고 자랑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한 일들을 자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 자기의 행한 일을 자랑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유명한 책 「기독교강요」제 1권 1장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또 한 가지는 인간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면 인간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하여 올바르게 지적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인간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중심으로 항상 선하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게 된다면 결코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몇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환상 가운데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하여 심판하시기 위하여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가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기 때문입니다."(사 6:5)

 

그가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보게 될 때에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들이 죄인이 하나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일들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의 합당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와서 기도하고 있는 바리새인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 성전에 올라올 때 제사를 드리는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하여 그의 은혜와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이에 반해서 세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마18:13)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자 자신의 모습이 죄인 됨을 깨달았습니다. 그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하게 될 때에 그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 없는 죄인 됨을 깨달았기 때문에 주의 은혜와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경우를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 그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정말로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조그만 잘못조차도 확대되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에 비추어 볼 때마다 자신의 죄를 구속해 줄 구속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업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의 기도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이 말의 헬라어 의미가 아주 중요한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 주옵소서"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히라스코마이라는 말입니다. 이 용어는 구약의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와 로마서 3:25에 나오는 화목 제물을 가리키는 히라스테이리온이라는 말의 동사형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익숙한 신자라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단번에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죄인이지만 속죄소 위에 뿌려진 그 피로 인하여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시은소)는 일 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동물의 피를 가지고 와서 뿌리는 곳입니다. 이때에 백성의 죄가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레 16:1-34; 히 9:11-13).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대면할 수 없었던 자들이 이 속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면하고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지금 세리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속죄소 위에 뿌려진 그 피를 보시고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리의 기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3. 비유의 결론

 

그러면 이 비유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시는지를 이제 알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온 방법은 자신의 선행에 기초해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세리가 하나님 앞에 나온 방법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속죄소 위에 흘리신 그 피를 기초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결론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은 우리의 선행에 의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이유는 자신의 행함에 기초하여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결단코 우리의 행함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이러한 사상은 로마서 3:25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말하는 구절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를 의지하면 의롭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어떤 행위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이 본문에 오해할 가능성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하고 행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행함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롭다 함을 얻어 새사람이 된 사람들은 새로운 신분에 맞는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벌로써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존재 근거가 모두 십자가 구속의 결과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세리처럼 자신을 낮추게 되지만 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바리새인처럼 자시의 행동을 자랑하게 되고 자신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8:14)

 

여기에 "자기를 높이는 자"는 자기의 행위에 근거하여 자기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임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자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낮추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행위나 능력 때문에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높이게 되고 교만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낮추게 되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비유의 핵심적인 교훈은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사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은혜를 사모하고 자기를 낮추고 주님 앞에 나아오면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의롭다하심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그 나라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자들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선한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에 대하여 "당연히 행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때가 되면 높여주시고 주님과 교제하는 복을 계속적으로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하나님 말씀] 탕자의 비유(눅 15:11-32)

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5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탕자의 비유라는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두 아들과 아버지 비유 본문 눅 15:11-32 설교 내용 본문의 비유를 흔히 탕자의 비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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