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구약설교말씀

[이사야 1장 강해설교말씀]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사 1:10-17)

기혼샘 2022. 11. 22. 21:33
반응형

이사야 1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책망하는 말씀을 선포한다. 제물을 많이 가져오지만 마음은 이미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제물만 가지고 오면서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고 있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기뻐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의 성전 마당만 밟은 뿐이라고 했다.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다. 안식일과 월삭의 절기로 모여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하나님은 견디지 못하겠다고 했다. 성도는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수님을 높이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사 1:10-17)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는 이미 망한 소돔이나 고모라를 찾은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시는 이 만큼 아직 남겨두셨는데 소돔 같은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심이다.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며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만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렘 23:14). 분명히 이같이 말씀하신다.

소돔은 관원이 더 악하였는지 고모라는 백성이 그리하였는지 모르거니와 상하를 다 말하여 가르친 시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지금 소돔 같은 죄를 짓고 있는 예루살렘 백성이요 관원들은 다 한 가지 할 일이 남아 있음을 명시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일이요. 그 법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다시 소돔의 죄목을 말씀하여 주신대로 다른 각도로 들어보자.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겔 16:49-50). 이런 죄를 반성하면서 말씀을 들으며 법에 순종할 것이다. 그 말씀은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며 그 법은 징계의 법이라 순종하면 회개할 것뿐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변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김은 제물 중심이다. 번제 같은 것은 매일 드리는 제사인 것이다. 조석으로 드리며 모든 화목제는 그 정형에 따르거니와 그 수가 제한이 없다. 그리하여 여기 무수한 제물이라고까지 하였다. 제사는 두 가지 의의가 있으니 죄를 고백하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감사하는 일이다. 그런데 죄는 회개하지도 않고 악을 그대로 행하면서 무슨 제사냐 말이다.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로 되었다.

죄를 바로 못 고치는 동안은 그 제사가 도리어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배 불렀다, 기뻐하지 않으신다 함은 그만두라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삼하 15:22). ”주는 제사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다.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시 51:16),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렘 6:20).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암 5:21),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미 6:7). 모든 제사 또는 희생이 통회의 예표임을 잊고 드림은 그의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또한 그처럼 무의미한 일이 다시없을 것이다.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9).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요구하시지 않는 예배는 그만 두라. 요구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요 4:23)는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가 필요한 것 뿐이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은 예물을 가져오면서 성지를 밟음은 마당만 더럽힐 뿐인 것이다.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형식적으로 가져오는 제물은 입술 뿐이요. 마음은 떠난(마 15:8) 제물은 거절하신다. 가인의 제물도 거절하신 바 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 4:5). 이는 죄의 인식 없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라 할 것이다. 죄의 인식 없는 제물 또는 예배는 헛된 예배인 것이다. 분향은 헌제에 따르는 일이요, 또한 항상 향불을 끄지 않음이 제사의 할 일이기도 한데 형식적 분향은 가증히 여기는 바이다.

분향은 기도의 예표이니 주님의 이름 없는 기도는 가증한 기도이겠다. 대회로 모이는 그 무슨무슨 회합, 여기는 월삭, 안식일 대회, 오늘의 그 많은 부흥회, 특별 집회도 모이는 것이 다 그런 가증한 일이 될까 조심할 것이다. 주님의 피 없이 모임은 그런 것이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한다 함은, 자기만족이나 꾀함이니 악한 일이다. 자신을 위하는 이기적 행동은 다 악한 일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하며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속죄하여 주셨는데 오늘 무슨 세미나에서 그 이야기한다는 것이 고작 십자가를 하나의 정신 고취의 이용이나 하려 함은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못하실 일이다. 우리의 성회의 일체는 그 구속을 강론하며 감사하며 죄를 깨우치는 일이 전문이 될 것이다. 오늘 세계적으로 모이는 회합도 많기도 하거니와 하나님께서 견디시지 못할 회의를 한다면 얼마나 죄송한 일이 되겠는가?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마음에 싫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를 통하여 분부하여 주신 절기이지만 이를 하나님께서 싫어하심은 그의 뜻이 거기 있지 아니함이다. 그의 뜻을 어긴 때문이다. 본의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만족으로 절기를 지킴은 잘못인 것이다. 이미 분부하신 대로 하지 않으니 이렇게 형식적으로 그 본의를 짓밟고 지키는 것이 도리어 짐이 되신다고, 거기에 곤비하시다는 말씀이다.

내 발언이 주님께, 내 걸음이 또 내 모든 성역을 한다는 것이 주님께 짐이 되지 않을까 항상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곤비케 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면으로 보면 하나님께 무슨 짐이 되실 것이나 곤비하신다 함이 말이 안 되는 말이거니와 자신이 이 쓸데없는 일로서 짐으로 곤비하게 바알 선지 같이 떠들든가 헛된 수고를 해서는 안 되는 말씀이기도 하며 자신의 이기적이며, 자아 만족을 하나님 경배로 착각해서는 안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손을 편다 함은 기도의 한 태도인 것이다. 솔로몬 왕은 손을 들어 기도하였다(왕상 8:2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희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리라”(벧전 3:12).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잠 1:28).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리라”(시 66:18). 듣지 아니하시는 기도는 상기의 여러 성경 구절도 있거니와 피가 그 손에 가득함은 살인을 말함이니, 살인이라 함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함이라고 보아 타당하다.

살인자 가인은 아우의 책임을 물을 때에 책임이 없다고 한 그것이 살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동포요 이웃을 모르면 안 된다. 그 책임이 내게 부과된 것이다. 형제의 책임이 없는 자는 피를 손에 쥔 자로 간주된다.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수 3:5).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약 4:8). 깨끗케 하는 유일의 길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흘려주신 그 보혈뿐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히 9:14), 이 길을 걷는 것이 믿는 길이다. 악업이요 악행이란 극한 이기주의를 가리킨다. 악업이란 악으로 사업을 함이라, 남을 못살게 하면서 산다로 받을 말이다. 이는 계획적이요 악한 행실이란 일시적일 수도 있다. 이를 버리고 그치는 일을 권한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렘 4:14).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 오라”(사 55:7).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악을 버리는 일이기도 함을 고시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엡 4:22), 여기 보면 옛 사람을 벗어버림도 한 일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8), 여기서도 합당한 열매로 악을 버리는 길이다.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도의면을 신앙인은 더욱 힘쓸 것이다. 아니 힘쓴다는 말보다 바른 신앙에서 살기만 하면 도의적 문제는 문제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다 분부되었기 때문이다.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내 할 본분이다. 선행은 이타를 말하고 공의는 대기(對己)적으로 자신을 제어하는 일이다.

남을 위하면서 나를 바로 치리하는 일이라면 되는 말이겠다. 이렇게 남을 위해서 살면서 자신을 바로 대하는 자는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는 일이 순조롭고 고아나 과부를 위한 동정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된다. 말하자면 인간애를 잘 발휘할 수 있음이다. 야고보서 1장 27절의 말씀에도 분명하게 경건한 신앙인은 경신(敬神), 애인(愛人), 수기(守己)의 3대 본분이 있음을 말한 바도 있다.

[레위기 5장 설교말씀 모음] 가난한 자의 속죄제 제물과 규례(레 5:1-19)

 

[레위기 5장 설교말씀 모음] 가난한 자의 속죄제 제물과 규례(레 5:1-19)

레위기 5장에서는 속죄제와 속건제의 규례에 대해서 말씀한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누구든지 부정한 짐승의 사체를 만졌을 때 그 사람은 허물이 있다. 깨달

kihonsam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