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샘 신약설교말씀

[빌립보서 3장 주일설교말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자(빌 3:1-21)

기혼샘 2021. 6. 2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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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빌립보서 3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실 부름의 상을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천국에서 받을 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상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절제를 해야 합니다. 쾌락의 삶을 절제하고 죄악의 삶을 절제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따라 하나님께 큰 상급을 받아 누리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목: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자” (빌 3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빌립보서 3:1-21

 

요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4)

주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자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빌립보서 3장을 강해합니다.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하는데 3장에서는 기쁨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1. 내가 가진 의(義) (빌 3:1-9)

 

1 마지막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복음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바울은 육신적으로는 고통스러웠을 것이지만 영적으로 기뻐했고 또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쁨의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義) 때문입니다.

 

1절 “마지막으로(Finally) 나의 형제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는 본서신의 주제입니다. ‘주님 안에서’라는 말은 기쁨의 이유와 원천을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의 가장 중요한 이유이십니다. 찬송 95장 1-2절에서

 

1)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2)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어느 꽃다운 동산에

양의 무리와 늘 함께 가셔서 기쁨을 함께 하실까

 

예수님 외에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건강도, 물질도, 육신의 아름다움도, 쾌락도, 세상 권세도 다 일시적이며 어느 날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또 그것들을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을 때에도 그것들은 진정한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참 기쁨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평강 가운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적 기쁨은 기쁨 후에, 아니 기쁨 중에도, 고독과 고통과 슬픔과 허탈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그런 유의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은 오직 예수님의 구원 때문에, 즉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확실한 소망을 얻었기 때문에 갖게 되는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주는 기쁨은 잠시며 부분적이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영구하며 온전합니다.

 

2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 ‘개들 dogs’은 도덕성이 없고 남을 물어뜯듯이 해치는 자들을 말합니다. ‘손(損) 할례당 concision’이라는 원어(카타토메 κατατομή katatome)는 ‘살을 베는 자, 절단자’라는 뜻으로 할례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몸만 상하게 한 자, 즉 거짓 할례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교인들을 비꼬아 한 말이라고 봅니다. 성도들은 그런 외식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8-29)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합니다.

 

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할례의 참 뜻은 마음의 성결에 있습니다. 이것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를 말합니다. 참으로 중생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이 참 할례당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도우심으로 해야 합니다. 또 그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만 기뻐하고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의(義)와 거룩과 완전이시며 위로와 힘과 기쁨이시기 때문입니다.

 

4-6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①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②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③ 베냐민의 지파요 ④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⑥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⑦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사도 바울은 저 율법주의 교사들처럼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훨씬 많은 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인 정도를 넘어 당시 최고 랍비인 가말리엘(Gamaliel, AD 25-50년 사이에 활동, 힐렐 Hillel의 손자, 행 5:34; 아기 예수님을 안고 축복의 찬양을 한 시므온의 아들로 알려짐, 눅 2:25-35) 문하생 출신으로 차기 최고 랍비의 후보였습니다(행 22:3).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자부할 만큼 유대인들 사이에도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열심으로 말하면 교회를 핍박하는데 주동자였습니다.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 그의 옷을 바울에게 가져올 정도로 기독교 박해에 앞장을 섰습니다(행 7:58, 8:1). 그래서 훗날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3)고 하면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of whom I am chief.” (딤전 1:15)고 했습니다.

 

7-9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loss)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loss)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the loss of all things) 배설물(dung)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that I may win Christ)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바울은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들, 즉 유대인이라는 신분과 혈통,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 의(義) 등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외모, 학력(스펙 Spec=specification), 재산, 건강, 가문, 경력, 사회적 신분 등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쟁이나 지진이나 무서운 전염병 등으로 죽거나 비천해질 때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더욱이 화려한 인간적인 자랑이나 배경은 신앙생활에는 방해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영적인 일에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눅 18:23-25).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배설물과 같이 여겼습니다.

 

성도는 땅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최고의 가치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또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러했다고 말합니다. 성도가 가진 의(義)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義)라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요점이요 기독교의 진수(眞髓)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의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무가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일 2:15-17).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데마처럼 어느 날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딤후 4:10). 아무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제가 중등부 때 부친 목사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직접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최고의 지식과 학식과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을 모두 배설물처럼 버리고 주님만을 자랑한 말씀을 듣고 결심하기를 저도 최고의 공부나 지위를 일단 쌓아두고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여 학문적으로 1등을 하며, 최고의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며, 월반을 두 번씩이나 하며, 최고의 학위를 받고, 교계에서 여러 활동을 하고 목회도 교수도 성공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배설물처럼 버리고 있지만, 그것도 쉬운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저의 자랑이기를 원합니다. 집회나 강연을 할 때 제 강사 소개는 하지 않거나 아주 약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만이 자랑하면 되고, 주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2.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0-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분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0-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깊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그분의 성육신(成肉身), 그분의 독특한 인격, 그분의 속죄사역, 그분의 은혜와 사랑은 참으로 깊고 신비한 사실들입니다. 그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죽음을 영원히 이기신 부활이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체는 장차 성도의 부활체와 영생할 몸의 모습입니다. 장차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였으나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의 삶도 고난의 삶입니다. 바울이 고난 중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듯이, 우리 모두도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12-14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몸의 부활은 아직 미래의 사건입니다. 그것은 육신적, 도덕적 완전 상태, 곧 완전 성화의 상태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아직 불완전한 성화의 상태에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아직도 육신의 연약성이 남아 있습니다. 성도의 기쁨과 평강도 때때로 현실 속에서 흔들리고 일시적으로 위축됩니다. 사도바울은 아직 부활을 얻었거나 완전 성화를 이루지 못했으나, 그것을 향하여 달음질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시기로 작정하신 구원의 완성인 영광스러운 몸의 구속(救贖) 곧 몸의 부활과 영생을 향해 꾸준히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행하는 성화(sanctification)를 말합니다. 구원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한 상급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잘 믿었고 이런저런 봉사와 사역을 했노라고 자랑하지만 말고, 지금도 상급을 위해 달려가야 하며, 미래를 향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꾸준히 계속 달려가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부활과 영생을 향한 삶입니다. 성도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위해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의(義)는 장차 우리가 얻을 영광스러운 부활과 영생을 보장하지만, 우리는 그 날을 위해 현재 성화(聖化)의 길을 성실히 달려야 합니다. 천국과 부활과 영생을 향해 쉬지 말고 달려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롬 6:22에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하였고, 갈 6:8에서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합니다. 13절에 ‘한 일’이란 ‘한가지 일’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많은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눅 10:42의 전통 사본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충고하시기를 ‘한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아래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요 6:27, 29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른 모든 일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14절에서 참으로 중요한 한 가지 일은 앞에 있는 푯대 혹은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는 그 목표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완성 곧 영광스러운 부활과 영생입니다. 그것은 이미 법적으로 얻은 의(義)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 즉 ‘완전 성화’입니다. 바울은 그 목표를 향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잘한 일이든지 못한 일이든지 간에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성도는 지나간 날들에 잘못된 일들을 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씻음 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의 자랑은 잊어버리고,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성도는 오직 완전 성화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며 예배 시간을 귀히 여기고 성경 교훈대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제주도에 거주하시는 이종룡 목사님(제주평강교회 원로)은 감리교회에서 은퇴하시고 제주시에 사시면서 현역 목회하실 때처럼 새벽기도, 주일예배, 오후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에 빠짐없이 출석하시면서 봉사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자기 생일이 되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운동(캠페인)을 하시는데 퍽 많은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한때 대구 삼덕교회 목회하시다가(1970-78년) 1978년 3월에 미국에 오셔서 산호세 서부장로교회(1978-1980년), 시애틀 한인장로교회(1980-1988년)를 거쳐 남가주 동신교회(1988-2003년)에서 15년간 목회 후 2003년 11월에 조기 은퇴하셨습니다. 1995년에는 미주한인장로교(통합측) 총회 20회 총회장으로 봉사하셨습니다. 은퇴 후 그동안 목회자로 대접받은 것을 감사하여 원로목사직도 내려놓으시고 스스로 평신도가 되셔서 교회 사찰로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며 후배 목회자들에게 많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좋은 사표가 되십니다. 신앙생활, 교회 봉사는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목회는 은퇴가 있어도, 신앙생활은 은퇴가 없습니다.

 

15-16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5절에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는 원어(텔레이오이 τέλειοι teleioi)는 ‘완전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고전 2:6에서도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법적 완전입니다.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법적으로 완전해졌습니다. 히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물론 이 완전은 실제적 완전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 1:28에서 “우리가 그분을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면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성도가 법적으로 얻은 완전한 의(義)는 자만(自滿)이나 나태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이미 무엇을 얻었거나 이루었다고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말고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16절에 전통사본[다수사본, 개혁자의 성경]에는,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우리는 같은 규칙으로 행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대는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화(聖化)의 정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인격 형성이 얼마나 이루어졌든지 간에, 우리는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또한 나태하거나 해이해지지도 말고, 오직 신앙의 목표인 부활과 영생을 위해, 즉 완전 성화를 위해 진지하게, 성실하게 달려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3. 나를 본받으라(빌 3: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이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이는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이니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분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의 할 수 있는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나를 본받으라.’라는 말은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할 것입니다. 첫째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의 확신이며, 둘째는 완전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향한 성실한 달음질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우리의 구원의 내용이요, 성도의 생명입니다. 또 완전 성화를 향한 성실한 삶은 성도에게 합당한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경건한 삶이요 의로운 삶입니다. 바울은 육체를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義)만 확신하는 복음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또 고난 중에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힘써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의 믿음과 그의 달음질을 본받으라고 담대히 권면합니다.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는 말씀에서 ‘보이라’는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걸음을 본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고 완전을 향해 성실히 달려가는 진실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힘쓰는 자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본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것입니다.

 

18절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이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러면서 저 행위구원론 자들은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만을 전파했던 바울과 그 동료들을 핍박했습니다. 저런 거짓 교사들은 실상 그리스도의 종들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원수들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저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 대해 이미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의 생애는 단순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바른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때때로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현실이었고 2천 년 신약교회의 역사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오늘날도 기독교회들 안에 배교자들과 또 그들과 타협하는 불성실한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아니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입니다. 오늘날도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저 배교자들과 타협자들로 인하여 바울처럼 눈물을 흘립니다.

 

19절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 대해 몇 가지로 묘사합니다. 첫째로,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계 19:20은 마지막 대 심판 전에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지옥 불 못에 던지울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와 같이 거짓 교사들의 결말도 지옥 불 못입니다. 둘째로, 그들의 신(神)은 그들의 배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육체적 욕심을 최고 가치로 알고 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먹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그 외에도 그들은 물질욕, 정욕, 명예욕, 권세욕 등에 사로잡혀 그것들에 종노릇 하는 자들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골 3:5). 그들은 욕심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셋째로,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현재의 영광이 결국 부끄러움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게 참된 영광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의 영광은 사실상 그들의 수치입니다. 마지막 날 그들에게는 큰 고통과 부끄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땅의 일’이란 썩어질 것, 허무한 것 그리고 죄악 된 것을 말합니다. 요일 2:16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지 않는 모든 자들은 다 헛되고 죄악 된 것만을 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0절 “이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이니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17절에 이어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시민권’이라는 원어(폴리튜마 πολίτευμα politeuma)는 ‘시민권’ 혹은 ‘나라’입니다. 거짓 교사들과 달리, 주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천국 백성이며 천국의 시민권자입니다. 어떤 이들은 미국 시민권을 부러워하지만, 천국 시민권은 그것에 비교할 수 없이 더 가치 있고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는 구원하시는 분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계 22:7, 12, 20). 우리는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이지만, 세 단계가 있습니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과거의 단계이고, 성화(聖化)는 현재의 단계이고, 영화(榮化)는 미래의 단계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이미 얻었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지만,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실제로 죄와 불행과 죽음이 전혀 없는 삶을 경험할 것입니다.

 

21절 “그분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분의 할 수 있는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예수님께서는 친히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다시 오셔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낮고 비천한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하기 위해 가질 부활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이 영광스러울 것이며 또 썩지 않고 강한 몸일 것입니다(고전 15:42-44). 여기에 성도의 기쁨의 이유가 있습니다. 부활과 천국과 영생은 성도의 기쁨의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며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영광스러운 부활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에 소망을 두고 천국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게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들 안에 배교자들과 타협자들이 많은 말세지말에 우리는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깨어 믿음을 지키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우리의 생각과 마음가짐과 삶을 중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뒤에 있는 것들, 즉 과거의 성공과 실패의 자취들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앞에 있는 완전 성화의 목표를 향해, 주께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인 부활을 위해 달려갑시다. 아멘.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로 하여금 과거에 했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현재에 성실하게 성화하게 하시며, 미래를 향하여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끝까지 달려가게 도와주옵소서. 우리의 푯대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의의 상급을 받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바벨론 음녀의 멸망(계 17:1-18)

 

[요한계시록 17장 주일설교말씀] 바벨론 음녀의 멸망(계 17:1-18)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17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바벨론 음녀의 멸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벨론 음녀는 이 세상의 거짓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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